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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수피아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 현재 역사관> 광주에 독립선언서가 전해진 것은 2월경 동경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부터이다. 정광호는 먼저,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장성 출신의 박일 구(朴一求) 등과 만나 광주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이후 정광호는 2월 중순 경 광주로 내려와 만세운 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한편,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준비하였다. 특히 선언서 등사는 일경의 감 시를 피하기 위해 박일구의 처가(장성 삼계면)에서 은밀히 진행하였다. 이들은 3월 5일 밤 양림동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 교사 및 광주 지역 애국지사들과 회합하였고, 이어서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서 부득이 작 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일정을 변경하였다. 당시 숭일학교 농감으로 있던 송흥진은 교내 학생들을 시위에 참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거사 당일 광주의 시위 군중들은 1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거세진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일제 기마 경찰과 헌병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송흥진과 동지들도 체포되어 ‘망동의 수괴(首魁)’로 지목받아 2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대구형무소 에서 2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21년에 출소하였고, 1922년부터 장로교 전도사가 담양군 여러 지역 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60년에 사망하였다. 여기서 잠깐 송흥진의 삶뿐만 아니라 전남 항일 기독교운동에 일생을 헌신한 타마자(John Van Nest Talmage, 1884~1964) 목사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호남지역 기독교 선교는 1895년 한국에 들어와 나주, 목포, 광주에 선교부를 세우고 30년간 복음의 씨를 뿌린 유진 벨 목사의 헌신으 로 시작되었다. 그가 바로 1908년 광주 숭일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타마자 목사는 1910년 가을에 광주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광주선교부를 중심으로 1942년까지 32 년 동안 담양, 장성, 광주 송정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송흥진은 그가 장성에 있던 19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