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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병력과 함께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때 주동자인 김영완 등은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다른 주동자들도 뒷날 모두 검거되었다. 고창 전체 지역 3.1운동의 선구가 된 열혈 청년 김영완은 이해 5월 21일 광주지법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1월 5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순국한 김영완 선생> 일제의 차디찬 감옥에서 24세로 생애를 마감한 김영완의 이력에 대해 상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참고로, 고창문화원의 원로이자 지역 향토사학자인 이기화(李起華, 87세) 선생에 의하면, 김영완에게 는 친형 김영휘가 있었는데, 그는 1882년생으로 은규선보다 1살 위의 손위 처남이었다. 김영휘 또한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가 정확히 어떤 조직에 가담해서 활동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김영 휘는 1938년 일제 경찰에 의해 서울 한강인도교로 쫓겨 철교 한가운데서 양쪽으로 협공을 당하게 되자 그만 한강에 투신함으로써 순국했다. 당시 그는 몸에 비밀문서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탄로를 막기 위해 극단적 행동을 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영완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비단 은규선 뿐만 아니라, 그의 형을 비롯한 가족들, 더 나아가서 무장에서 대대로 살아온 무장인으로서의 기질도 한몫 했다고 보여진다. 이처럼 강고한 무장 기질은 비단 김영완 형제뿐만 아 니라 박영관에게도 켜켜이 내재되어 있어, 언제고 치열한 항일 독립투쟁으로 발화될 것이었다. 박영관은 3.1운동 당시 김영완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했는데, 이와 관련되어 두 사람이 평소 어느 정도의 유대와 교류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박영관의 3.1운동 거사 계획이 직접적으로 김영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지역 연고 외에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된 것 같 지는 않다. 박영관은 거사가 있기 직전 도곡리 자택에서 이웃한 장성군에서 온 송주일과의 밀회를 통해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따라서 박영관과 김영완은 거사를 함께 도모하고 결의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계획만큼은 공유하면서 시간대를 서로 달리하여 봉기하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보여진다. 그렇 다면 박영관을 찾아온 송주일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