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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27 독립운동가로서의 송와 박영관의 구체적 행적은 3.1운동 시점부터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이나 각종 사적비, 또는 지금까지 발간된 여러 팸플릿과 책자 등에 는 3.1운동 관련 기록들이 너무 소략하고 그 서술도 모호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아마도 박영관의 독립운동 행적이 주로 전북폭발탄사건에 집중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 전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소홀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한계를 전제로, 각종 기록과 증언에 의거하여 고창군 무장면 지역에서 발생한 3.1운동과 박영관의 행적,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하나씩 실마 리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김영완과 김영휘 형제 1919년 3월 15일, 마침내 고창군 지역 최초의 3.1만세운동이 무장 읍내에서 결행되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날의 만세운동은 두 개의 주체가 시간대와 장소를 달리 하여 봉기했다. 하나 는 오전 10시 경 김영완(金永琓, 1896~1919)을 중심으로 그의 친족인 김용표⋅김상수와 친구인 이용욱⋅이준구⋅김진호⋅박흥선⋅오태근⋅박흥수 등이 무장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단행한 것이 고, 다른 하나는 오전 11시 경 박영관이 주체가 되어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고 김영완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등을 입수하여 학교에서 다수를 복사한 후 동명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 런데 이 두 거사에는 은규선의 처남인 김영완이 모두 간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전에 김영완과 박 영관이 충분한 논의와 계획을 거쳐 실행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김영완을 중심으로 무장 장 터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전말을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무장의 만세운동은 고창청년회의 은규선으로부터 계기가 시작되었다. 은 규선의 처남인 김영완은 무장에서 대대로 세거해온 광산김씨 가문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24세의 젊은이였다. 그는 1883년생의 은규선보다 13세나 손아래인 처남이었기에, 나이로 보나 경륜과 애국 심으로 보나 매부인 은규선을 몹시 존경하고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김영완이 무장 3.1운동의 주체 가 된 것은 매부 은규선으로부터 “스물네 살이 되도록 뭐했냐?”는 따끔한 질책을 듣고 나서였다. 은규선은 서울로부터 정보를 입수할 요량으로 김영완에게 여비를 마련해주며 3월 3일의 고종 국장 (國葬)에 참여토록 충동했다. 이에 서울로 일찍 상경한 김영완은 뜻밖에도 이보다 앞선 3월 1일 파고 다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무장으로 내려오자, 은규 선은 흥덕 봉기의 실패를 상기시키며 그로 하여금 무장에서 거사를 행하도록 지시했다. 김영완은 진작에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박영관에게도 선언문을 내주었고, 본인은 오전 10시에 무 장 장터 군중들 앞에 나아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어서 대열을 인솔하여 남산(지금의 영선중학 교)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군중들이 모두 환호성을 올리며 따라 나섰다. 이용욱과 김용표 등은 사전에 이미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터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터였다. 수백 명의 군중 함성에 놀란 무장주재소 순사는 고창경찰서로부터 증원된 수십 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