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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이었다. 이들 중심에 있던 은규선은 3.1만세운동을 들불처럼 퍼뜨려야 한다는 선구적 소명의식이 있 었다. 그런데 고창읍은 행정소재지로서 군청과 경찰서 등 일제의 영향력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이 었다. 따라서 은규선은 흥덕 쪽을 주시하다가 그곳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처가가 있는 무장 지역의 봉기를 먼저 유도하고 지원했다. 무장면은 고창 중심으로부터 일정 거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 적으로 항일 의식이 가장 드높아 부싯돌만 당겨지면 언제든 불길이 솟아오를 뜨거운 지역이었다 . 마침내 3월 15일 무장 장터에서 고창군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3월 21일에는 고창 읍에서 수백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최초 봉기가 무산되었던 흥덕 지역은 1년 뒤인 1920년 3월, 3.1운동 1주년을 맞아 성내면에서 기념시위를 하고 민중궐기를 촉구하려 했으나, 사전 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혹독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4) 박영관의 무장 3.1운동과 몇 가지 의문점 앞서 박영관이 태어나서 청소년기를 보낸 전라북도 무장 지역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밀양박씨 규정공파 가승보를 통한 박영관의 선대 가계에 대해 이미 언급하였다. 또한 가승보의 기록과 달리 박영관의 생년을 1899년으로 인정하되, 기타 그 부모의 생몰연대는 가승보를 그대로 신뢰한다면, 그는 7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런데 2016년 송와박영관기념사업회에서 발간 된 전북 폭발탄사건의 주역, 독립운동가 송와 박영관이라는 책자에 의하면, 박영관은 3세 때 어머 니를 여의였고, 16세에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셨다고 되어 있어 일단 그 부모의 실제 생몰년이 가 승보와 크게 다르다. 또한 책자에는 “남다른 효행과 총명함, 강인한 체력과 인내력을 지닌 장부로 성장하여 정의와 의협심이 남다른 분이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확인 가 능한 자료들이 부족해서 몹시 아쉽다. 말년의 구술 자료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 서당을 다니며 한학(漢學)을 배웠고, 근대적 학교교육도 접했는데, 여기에 타고난 총명함까지 있어 장래가 매우 촉 망되는 청년이었다. <박영관 선생의 증명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