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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25 이들 현은 1895년 모두 군(郡)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1914년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직전까지 무장군과 흥덕군의 행정중심지는 각각 위 지도의 무장면과 흥덕면에 있었다. 그렇다면 길게는 1천년 이상, 짧게는 5백년 가량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던 지역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아침에 사라진 고을에 대해 지역에서 세거해온 사람들은 과연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을까. 이 는 결코 녹록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비록 통합 고창군이 되었다 할지라도 1919년 시점에서 겨우 5년밖에 안 지난 때라면, 무장의 지역민들은 잠재의식 속에서 여전히 자신들을 고창 사람이 아니라 ‘무장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박영관을 비롯하여 스무 살 이전의 청소 년기를 이미 기존의 무장인(茂長人)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보인다. 더구나 행정구역 통폐합은 일제의 강압적 정책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이에 대한 반감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1914년 이전의 생존자가 없는 오늘날조차도 어디선가 우연히 옛 무장 지역에 본적을 둔 사람들을 만나면, 은연중에 자신이 위세 등등했던 고을이자 항일 투쟁의 선도지였던 무장 출신임을 자부하곤 한다. 1919년의 고창 지역 3.1운동은 이런 지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던 고창청년회의 주축은 은규선 등 혈맹 3인방을 비롯한 기존의 고창군 출신 청년 선각자들이었고, 따 라서 이들은 본래 1914년 이전과 이후에 있어 지역정체성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던 사람들이었 다. 그들의 행동반경은 자연히 고창읍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은규선 같은 사람은 이런 협소한 범위를 넘어서서, 이미 중국 상하이까지 다녀와서 아시아는 물론 세계정세의 흐름까지 통찰 할 수 있는 선각자였다. 그는 고종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장례가 끝난다고 그저 흩어지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은규선이 한참 손아래 처남 김영완(金永琓, 1896~1919)을 서울로 보낸 시기는 바로 이런 폭풍전 야의 긴장이 맴돌던 때였다. 3월 1일 파고다공원 만세시위에 참여한 김영완은 독립선언서 등의 유인 물을 가지고 몹시 흥분된 상태로 돌아왔다. 이때 은규선은 서울에서 내려온 그에게 “흥덕에서 만세 운동이 실패했으니 무장에서 하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전체 고창군 지역에서 가장 먼저 3. 1 운동을 계획했던 곳은 흥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흥덕의 성내면과 부안면 등에 는 2.8독립선언의 주인공인 백관수를 비롯해 흥덕학당과 흥동장학계 등으로 대변되는 애국적 항일 의지가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드높던 곳이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흥덕에서의 봉기가 실 패로 돌아가자 은규선은 김영완 등 무장 출신 청년들로 하여금 무장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도록 추동했던 것이다. 이제 통합 고창군 최초로 무장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전체적 그림을 필자 나름대로 추론하 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장 지역은 역사적 정체성과 항일 투쟁의식 면에서 고창의 세 고을 중 가장 강렬한 색채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데 동학혁명과 의병항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을의 인적, 물적 자원이 상당히 고갈되 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통합 고창군의 주도세력은 고창읍을 중심으로 한 고창청년회 멤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