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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근촌 백관수 선생 초상과 고택(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이 과정에서 은규선과 김승옥 등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조직과의 접선을 시도하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들은 1년 뒤에는 계획을 바꾸어 국내에서 밀령을 받아 활동 하기 위해 귀향했다. 김승옥은 고창면사무소 서기로 위장취업하고, 은규선은 단독으로 청년운동의 불씨를 지펴내기로 하는 등 외형상 완전 별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전해지자 국내에서도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은 신기업의 자금 지원과 함께 고창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청년조직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또한 고창의 한문 사숙 출신자와 양명보통학교 출신자 중 사상이 확고한 청년들을 동지 로 규합하면서 1918년 11월 초, 마침내 고창청년회의 역사적인 창립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통해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견인함으로써 지역 청소년 육성의 터전 을 마련해주었다. 1919년 3.1운동의 기세가 전국 각지로 전파되면서 고창에서도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이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고창 모양성의 북치에서 청년회원들 및 고창보통학교 고학년들과 합세하여 시내를 향해 행진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승옥(당시 31세)이 1년 6개월, 오동균(당시 24세)이 10개월, 김창규(당시 27세)가 6개월을 각각 언도받았다. 이밖에 김명만(당시 19세) 등 11명 의 청년회원은 고창경찰서에서 태형(笞刑) 10대를 받고 방면되었다. 이처럼 고창 지역 3.1운동의 주역 이 된 고창청년회는 호남의 군 단위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조직된 청년회로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통한 독립운동까지 그 활동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위상이 뚜렷하다고 하겠다. 참고로,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립과 관련되어 그 전신인 오산학교와 흥덕학당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흥덕학당은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전인 1912년, 흥덕군 부안면 오산리에 오산교회와 더불어 설립되었다. 오산교회의 설립 당시 명칭은 하오산교회(下吾山敎會)인데, 이때 흥덕학당도 함 께 세워져 선교와 교육을 병행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학교의 설립자는 고창 사람들이 흔히 ‘승 부(枡富) 교장’이라 부르며 존경하고 사랑했던 일본인 마스도미(富左衛門, 1880~1934)이었다. 일본 고베신학교 출신의 승부 장로는 윤치병⋅양태승⋅김영구 등의 지역 청년들을 고베신학교에 유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