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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사립학교인 양명학교(揚明學校)가 설립되었다. 설립자인 은성채(1866~1930)는 오늘날 정읍시 고부 면의 고부(古阜)를 본관으로 하는 고부은씨(古阜殷氏, 본래는 행주은씨)로, 그의 이력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같은 능참봉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세종대왕의 능묘를 관리하는 영릉참봉을 역임했고, 또 학교를 설립할 정도의 재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지역의 유력한 인물이었음 을 짐작할 수 있다. <양명학교로부터 시작된 고창초등학교> 1914년 이후의 통합된 고창군 지역 청년회와 3.1운동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은규선(殷圭宣, 1883~1942)은 바로 은성채의 양자이다. 은규선의 아명은 성봉(成奉)으로, 고창면에 서 은익삼(殷益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은규선의 집은 본래 대단히 가난했는데, 부유한 일가인 은 성채에게 양자를 갔다. 은성채는 집에 별도의 사숙(私塾)을 세워 은규선에게 7년간 한문을 가르쳤다. 이로써 은규선은 학문은 물론, 민족의식도 일깨울 수 있었다. 은성채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1907년에는 신학문 양성을 위해 현재 고창초등학교 자리에 3년제의 사립양명보통학교를 세웠는데, 은규선이 다시 이 학교의 1회 입학생이 된다. 사립양명보통학교는 1909년에 사립고창보통학교로 바뀌고,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거, 4년제인 고창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 었다. 은규선의 호적 생년이 1890년으로 된 것은, 그가 1909년의 민적법(1909년 3월 4일 법률 제8 호로 공포⋅실시한 호적법)에 따라 1년 남은 학교를 계속 다니려고 나이를 한참 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융희 4년(1910년) 3월 26일자로 발급된 은규선의 수료증에는 ‘사립고창보통학교’ 직인이 찍 혀 있다. 한편 격동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성장기를 보낸 고창의 청년들은 선배들의 우국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투쟁의식으로 재무장함으로써 지역에서 애국계몽 및 항일운동을 위한 청년조직이 형설될 수 있 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계기를 만든 주역은 은규선과 함께 당시 고창의 혈맹 3인방이었던 김승옥 (金升玉, 1889~1962)과 신기업(申基業, 1892~1975)이었다. 김승옥은 고창 3.1운동의 주동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