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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전환점이 된 3.1운동 ∙ 17 끝으로, 이와 같은 대내외적 분위기 속에서 3.1운동의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독살설이었다. 고종은 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1919년 1월 사망할 때까지 모두 5번 가량의 망명을 시도했다. 이는 곧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 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던 고종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1918년, 고종은 마지막 망명지로 중 국 북경(北京)을 선택했다. 이에 망명정부를 세우려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919년 1월, 이 제 고종이 경운궁을 나서서 측근들과의 합류하기만 하면 성사될 듯 싶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서 고종은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덕수궁 문을 나오는 고종의 상여(1919년 3월 5일)> 당시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이는 고종의 망명정부가 식민 통치에 커다란 방해요소가 될 것임 을 안 일제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여 고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3월 1일에 서울 종로 와 서대문 일대 조선인 주택가에는 일제의 사주로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격문이 퍼져 있었고, 이로 인해 민중들의 잠재된 분노가 치솟아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여기에 3월 3일의 고종 장례 식을 위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경성역으로 올라옴으로써 만세운동의 참여자가 급격히 증가되었다 . 2) 고창청년회의 설립과 고창 지역 3.1운동의 태동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1910년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의 무장⋅고창⋅흥덕 지역은 동학 농민혁명 이래로 1만 여 명 이상의 애국지사들이 희생되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고창과 무장의 유지들은 서둘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선각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 다. 이에 고창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인 1907년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낸 은성채에 의해 3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