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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자결주의란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표방한 핵심 조항으로서, 그 내용은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을 인정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의 발표로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 세계의 수많은 약소민족들 은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어디까지나 패전국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존 식민지에 자결권을 주는 한편,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이중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원칙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김규식 대표(오른쪽 첫 번째줄)> 비록 민족자결주의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는 3.1운동의 분위기 고조와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선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대표로 뽑아 한국대표단 일행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일행은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3월 13일 에 파리에 도착했는데, 이때는 한창 국내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질 때였다. 또한 3.1운 동의 초기 민족대표를 참석시키지 못했던 조선의 유림들은 곽종석(郭鍾錫)을 대표로 장문의 독립청 원서를 작성하여 3월 29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분위기에 고무된 일 본 유학생들은 사전에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후, 2월 8일 도쿄의 조선YMCA 강당에서 긴급히 ‘조선 청년독립단’을 결성함과 동시에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때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고 창군 성내면(옛 흥덕군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관수(白寬洙, 1889~1961)이다. 뿐만 아니라 독 립선언서 1만부를 찍어낸 곳도 백관수의 동경 하숙집이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도 백관수였다. 이로써 주모자인 백관수를 비롯한 학생 8명이 기소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이때의 독립선언서가 국내 에 밀반입되어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