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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게다가 일제의 원활한 수탈을 전제로 한 전국적인 행정조직 개편과 토지조사사업으로 수백만 농 민들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이나 화전민 혹은 자유노동자로 전락하였고, 반면 조선 총독부는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총독부는 이들 토지 를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비롯한 여러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의 이민(移 民)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하여 일본인 대지주의 출현을 유도하였다. 비단 조선총독부와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그리고 토지 수탈 외에 쌀값폭등으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조선의 쌀값은 일본의 쌀값 동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로 도시인구가 급증하였고, 이에 반해 농촌 노동력 부족과 인건 비 상승, 폭풍우 피해 등으로 1917년도 쌀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일본의 대미곡상과 지주들은 매점매석을 통해 쌀값이 대폭 상승하였고, 일본정부는 자국 내 쌀값 진정을 위해 오사카의 한 상점을 대리로 내세워 비밀리에 조선 쌀 20만 석을 매점하도록 유도했다. 이에 1919년 1월 경에는 국내의 쌀값이 거의 두 배 가량 폭등하여, 당시 신문에서는 ‘사람 죽일’ 시세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1918년 이후 노동자들의 동맹파업과 임금투쟁이 격화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일본으로 수송하기 위해 적재해놓은 쌀가마니> 한편 당시의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이제 막 1차 세계대전이 끝났 을 무렵이었다. 1914년 7월에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 다. 전쟁의 양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가들과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의 동 맹국 간의 치열한 공방으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안타깝게도, 이때 일본은 영국의 요청으 로 8월에 선전포고를 하며 참전함으로써 그야말로 일본 국내외의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았다. 즉, 당시 일본 지도층은 전쟁이 비교적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 예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