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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영관의 선 대와 가 계의 전승 ∙ 11 도곡리와 각각 서쪽, 북쪽으로 인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따라서 박영관의 직계 선대는 매죽당 박종 명 이래로 충청도 목천에서 전라도 흥덕을 거쳐 마지막으로 무장에 정착해서 박영관이 태어나던 무 렵까지 약 200년에 걸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박영관은 3.1운동 이후 쫓기는 몸이 되어 목포 쪽에서 활동하다가 목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전남 장성에서 은거했다. 그러나 그의 일가들은 여전히 고창 도곡리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다. 한편 박 영관의 생가는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고, 현재 생가에는 맏형 박종내의 4남인 박태회(朴泰淮, 91세 ) 가 거주하고 있다. <박영관 선생의 생가 : 조카 박태회와 장손 박동규 기념사업회 회장> 박영관의 직계는 박자응의 넷째 아들 박수천의 종가였지만, 그의 아버지 박형규(朴瀅圭, 1863~1910)가 셋째아들로 태어나면서 지파(支派)가 되었다. 박형규는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달리 한 반면, 맏형이자 종손인 박백규(朴伯圭, 1854~1940)는 85세, 둘째형 박상규(朴相圭, 1857~1930) 는 74세로 고향에서 장수를 누렸다. 종손 박백규는 대대로 전해지는 가풍이 체화되어 학문과 덕행으 로 이름이 높았고, 그래서 인근 지역 유림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가풍은 자연스럽게 동생 박형규를 거쳐 조카인 박영관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박영관은 어린 시절부터 서당을 다녀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했고, 1909년에 설립된 동명보통학교를 다니며 신학문도 접한 것으로 보 인다. 그는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학습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예술적 재능도 풍부했다고 한다. 한편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읜 박영관은 평생토록 이것이 커다란 한으로 남았던 듯하다. 훗 날 그는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장성에서 평생을 지냈는데, 어린 시절 곁에서 조부를 모신 장손 박동규(朴東圭, 62세)에 의하면, 조부께서는 일찍 돌 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몹시 사무치셨다고 한다. 그런 한스러움 때문이었는지, 박영관은 말 년에 부모를 좋은 묘자리로 모시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뒷부분에서 다시 서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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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창청년회의 설립과 고창 지역 3.1운동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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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창청년회의 설립과 고창 지역 3.1운동의 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