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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이미 대세가 넘어간 것을 깨닫고 경기감사였던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결하였다. 사실 반정을 일으킨 서인 세력들은 박승종이 인목대비를 보호하려 애썼던 공로를 생각해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 박승종은 사후 234년만인 1857년(철종 8)에 복권되어 숙민(肅愍)이라는 시호를 받음으로써 밀양박 씨 숙민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박승종 부자의 죽음으로 그 가계는 둘째 아들인 영광군수 박자응(朴自凝, 1589~1645) 계통으로 이어졌다. 박승종은 자결 직전 박자응에게 죽지 말고 살아남아서 제사를 받들라는 유서 한 통을 전 달했다. 박자응 또한 일찍이 인목대비 폐모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때문에 반정세력들도 굳이 그마 저 죽이지는 않으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읍백당(揖白堂)은 박자응의 호이자 그가 살던 집터이기 도 한데, 여기서 ‘흰 백(白)’은 서쪽을 뜻하는 색이므로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西宮)을 뜻한다. 따 라서 읍백이란 ‘서궁을 향해 절한다’는 뜻이다. 박승종이 살다가 박자응에게 물려준 이 집은 인조반 정 직후 김류(金瑬)가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이 터에는 표석이 남아 있어 비운에 스러진 박승종 부자의 사연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시 중구 예장동의 박승종과 차남 박자응 집터, ‘읍백당(揖白堂) 터’> 박자응은 아들 넷을 두었고, 그 중 넷째인 박수천(朴壽天, 1622~1686)의 직계 9대 종손이 바로 박영관의 백부인 박백규(朴伯圭)이다. 숙민공 박승종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충청도 공주로 이장했는데, 1961년에 천안 목천을 거쳐 1975년에 다시 고양시 주교동으로 옮겨졌 다. 박수천과 그 아들 박만리(朴萬里, 1637~ ?)의 묘가 천안 목천에 있는 것으로 보아, 박자응의 후손들은 처음에 목천에 세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승보에 의하면, 박만리의 아들 박종명(朴 宗溟)은 충청도 목천에서 남쪽인 전라도 흥덕현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이유로 숙민공파 후손 중 일부 가 대략 17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전라도 지역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숙민공의 현손이자 규정공파 19세인 박종명은 호가 매죽당(梅竹堂)으로, 1694년(숙종 20)에 진사 가 되어 1722년(경종 2)에 참봉을 역임했다. 흥덕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박종명의 묘는 실전되 었지만, 그 후손 중 박영관으로 이어지는 계통의 묘소들은 모두 7대에 걸쳐 무장현에 조성되었다. 즉 이들 묘소는 현재 무장면 송계리와 해리면 고성리에 있는데, 이 두 곳은 박영관의 고향마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