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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153 군산 항(群山港)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군산항에서 빠져나간 쌀의 양은 1925년에 99만 8천 7백 69섬이었고 1934년에는 2백 28만 5천 1백 14섬으로 증가하였는데 당시 한 국 전체의 쌀 수출의 42%에 해당된다. 이러한 착취와 상거래로서 이리의 일본인 거리는 흥청거려 유흥가로도 이름이 났다. 이리 는 일본인들의 황무지개간으로 이루어진 도시였으나 그 주변의 토지를 잠식하여 식민지하의 다른 농촌의 경우와 같았다. 지주는 자작, 자작 겸 소작, 순소작인이 되고 본래의 자작 또는 소작인은 영세농민화하였으며 농민들은 정든땅을 떠나 도시주변 토막민의 막벌이나 거지가 되든지 만주 간도로 이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땅 좋고 물 좋은데 신작로 나고 인물 좋은 큰 애기는 갈보질 가네 아주까리 종자야 여기봐라 우리딸 삼형제가 갈보질 간다. 익산군지(益山郡誌)에 실린 이 민요는 그 당시의 사정을 말하고 있다. 혹자는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현대시설을 한 공이 있다고도 하나 그 시설이란 한국민의 세 금을 거둬들여 일본인을 위한 수도⋅전기⋅병원시설을 한 것이었으며 그 표본이 이리이다. 일본인에 의하여 개척된 이리시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사학 명문 남성고(南星高) 총독부가 한‧일합방 후 한국민의 회유책으로 은사금을 강제로 받게 하자 김근배(金根培) 열사는 “내가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은 받을 수 없다”고 자결했고, 3.1운동 때는 이리시장에 6백여 군중이 모여 격렬한 독립운동을 폈다. 해방 후 이리시는 새 면모로 변했다. 일본인 중학교밖에 없던 이리시에 1946년 3월 이윤 성(李潤成) 여사의 막대한 토지 희사로 사립 남성(南星)고등학교가 설립되고 초대교장에 윤 제술(尹濟述)씨가 취임하였다. 해방 후 설립된 남성고등학교 출신이 이리 지역은 물론이요, 경향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필자의 사사로운 일이지만 해방 2년 후 가을에 평양공업전문학교의 같은 과 동기생이었던 윤제술 교장의 장남인 현(現) 도로공사 부사장 윤상옥(尹相玉) 군이 금빛으로 출렁거리는 김제평야를 구경할 겸 이리(裡里)로 오라 는 편지를 서울에 있는 나에게 띄웠으나 가지 못해 그때의 이리를 구경하지 못한 일은 지금 도 한스럽다. 1977년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이리역 폭발사건으로 이리는 처참한 피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 이리는 새 도시로 정돈되고 새 공업단지가 들어서 농업과 공업의 균형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