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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水稅)를 계기로 하여 고종31년(1894년) 고부 군민들이 일어나 동학군의 봉기로 확대되었 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개입으로 이 지역 농민들은 더 큰 피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전북 곡창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식민지화 과정은 유럽의 선진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상인이나 관리를 파견하여 착취한 것과는 달리 먼저 빈농을 이주시키고 토지를 약탈하며 불량 소모품을 팔아 쌀을 반 출해 가는 데 있었다. 개항 후 일본 상인들은 농촌으로 침투하여 불법으로 토지를 약탈하고 뒤이어 일본인 대자본가들이 토지에 대한 투자를 함으로써 토지 약탈을 하였다. 1904년 그들은 돈을 주고 토지를 사는 것보다는 황무지개간이란 구실로써 토지를 약탈하 려 하였으나 한국 조야의 맹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그들의 토지 약탈은 계속되었고 1907년 「국유간지이용법」이 제정됨으로써 한국의 토지는 그들에게 맡겨진 것과 다름없었다. 갈밭에 싸여있던 한 촌속리는 전북평야의 중심지이고 군 산항과 통하는 곳으로 간척지를 노리던 일본인들에게는 가장 군침 도는 땅이었다. 1904년 에 이곳에 온 일본인 진전상치(眞田尙治)는 익산군 오산(五山)면에 3천 정보가 넘는 농장을 개설하였고 계속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서 한‧일합방이전에 익산지역의 농토는 거의 점거되 었다. 일인(日人) 3천 명 거주 그러나 우리 관리의 부패와 무능의 잘못도 반성 되어야 한다. 그 한 예로서 대지주였던 전 주(全州)의 이속(吏屬) 김창석(金昌錫)은 큰돈을 뇌물로 바쳐 승지의 지위를 얻고 이 지방의 황무지개척의 균전사가 되어서는 황무지개간이란 명목뿐으로 황폐한 진전에 대해서는 세금 을 받을 수 없는데도 유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게 하여 세금을 받고 타인의 토지를 약탈하 였다고 한다(익산군지(益山郡誌) 참조). 1908년에 전주~군산 간의 전군도로가 뚫리고 익산의 군청⋅일본헌병대⋅우편소가 금마 에서 이리로 옮겨졌고, 1912년 이후 호남선과 군산 지선의 철로가 개통되면서 이주민이 급 증하고 한촌이었던 이리는 도시로 급변하였다. 이리에는 한국토지수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 회사의 지사가 있어서 그 힘을 빌어 방대한 수리사업이 일어났으며, 1927년 8백82가구 3 천3백22명의 일본인이 살았는데 그 대부분은 동척이민이었다. 농장에는 동척이민인 일본 빈농 아래에 한국인 농민이 집단적으로 살게 하여 농노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또 면화생산은 일제의 국책으로서 이리 지역은 면화의 산지이며 집산지였다. 면화를 위시한 농산물은 일정한 장소에서 공동 판매토록 하여 지정장소 외에서 판매하면 밀 매로 단속하였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쌀의 정확한 수확량은 알 수 없으나 전북평야 쌀은 이리에 집결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