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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151 5. 최영희(崔永禧) 교수의 한국사기행, 그 터 <49> 이리(裡里) - 경 향 신문 , 198 6. 7 . 1 0 - “솜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리로 가면 솜리입니다” <솜리>가 <이리>요, <이리>가 <솜리>이다. 이리(裡里)의 본디 지명은 깊숙한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솝마을」 이었을 것인데 안이란 옛 우리말인 「솝」 은 「속」 으로 변하고 한 자로는 뜻으로 새겨 속리의 이(裡)와 마을 리의 이(里)를 써서 이리(裡里)가 되었다. 그리고 속리는 발음하기 쉽게 솜리로 변했다. 이리는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익산군에 속해 갈대가 무성한 강과 습지에 둘러싸여 있었 고, 지금 이리시의 구 시장과 구슬재(주현동)의 구릉지대에 10여채의 인가밖에 없던 마을이 었다고 한다. 원광대(圓光大) 김삼룡(金三龍)박사의 저서인 「익산문화권(益山文化圈)의 연구」 중 익산 미륵산 상공에서 찍은 금강 유역 항공사진을 보면 오늘과는 달리 서해의 바닷물이 익산군으로 깊숙이 들어온 흔적이 있다. 그런데 제방을 쌓은 뒤로 만경강의 폭은 좁아졌고 흐름도 달라졌으며, 제방에서 제외된 옛 구강(舊江)은 아직도 이리시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흐르고 있다. 새로 이리시에 편입된 팔봉 면에서 좀 더 동쪽으로 가면 「고도리(古都里) 인석(人石)」 두상이 서 있는데 이는 불상이라고 도 한다. 옆에 서 있는 비석에 의하면 함풍 8년 무오사월, 즉 조선 철종8년(1858)에 중건한 것이다. 김제(金堤) 평야 중심지 이 인석(人石)은 수문을 지키는 지신의 역할을 했던 석상으로서, 서쪽 것은 안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여신, 동쪽은 남신으로 전하며 장승과도 같은 감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각 형태로 보아 미륵신앙에 의한 미륵불로도 보이는 토속신앙과 불교의 혼합으로도 생각된다. 그런데 30여 년 전에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두 석인 사이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도 없이 논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이리시는 본래 풍수가 「십리노화불견소〔十 里籚花不見巢(沼)〕」라 하여 강과 늪의 갈대가 무성하여 보이지도 않던, 물에 둘러싸인 안쪽 속 마을 이었는데, 「속」 의 뜻에는 깊숙한 안에 들어 있어서 중심을 이룬다는 뜻이 있어서인 지 공창 김제평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의 이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비옥한 곡창으로 그 때문에 농민들은 더 많은 착취를 당했다. 한 말 고부(古阜)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나 만석보의 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