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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영관의 선대와 가계의 전승 ∙ 9 박영관의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26세이다. 박씨(朴氏)는 우리나라 3대 성씨 중 하나인데, 그 중 밀양박씨는 박씨 전체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는 본관이다. 시조 박혁 거세를 1세로 하여 29세인 신라 경명왕은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각각 본관을 달리하 는 박씨로 분파하였다. 그중 맏아들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이 바로 밀양박씨의 시조가 된다. 밀성 대군으로부터 다시 15세를 내려와 박혁거세로부터 45세가 되는 박현(朴鉉, 1253~1340)은 우리나 라 성리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려 충렬왕 때의 안향(安珦)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그에 버금가는 유학자로 칭송을 받았다. 박현은 사헌부의 종6품에 해당하는 규정(糾正) 벼슬을 하였는데, 이로부터 그는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규정공파는 밀양박씨의 60% 가량이나 차지할 만큼, 가장 번성한 분파이다. 규정공의 6대손 박중손(朴仲孫, 1412~1466)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세조 를 도와 공신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규정공파의 입지를 확실히 다져놓았다. 이후 박중손의 후손들은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 관료로 진출했는데, 그의 7대손인 박승종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밀양박씨 숙민공파 가승보의 박승종-박자응-박수천 승계> 규정공으로부터 14세가 되는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에는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큰아들 박자흥(朴自興, 1581~1623)은 대북 세력의 핵심 이이 첨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었다. 따라서 박승종은 이 이첨은 물론 광해군과도 서로 사돈지간이 된다. 이처럼 그는 권세가 극에 달했지만, 사돈인 이이첨 의 무리들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할 때는 이에 반대하며 극한 대립하였다. 또 정치적으로 그는 광 해군의 중립외교를 지지했고, 동시에 후금에 대비할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던 현실감각 있는 인물 이기도 했다. 반정이 일어날 기미를 알고 있었던 그는 뒤늦게라도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