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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맺음말 ∙ 135 명함과 굳은 절개, 그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애로 장성의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유지이자 서민 들의 따뜻한 벗이 된다. 선생은 1975년 10월, 77세의 수를 누리고 한국 현대사의 질풍노도를 뒤로 한 채 평온하게 영면에 들었다. 이 글의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선생은 식민지시대 평범한 민중으로 태어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자 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실천적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던 우리 항일 애국 지사들의 생애를 대변하는 분이다. 특히 선생의 청장년기 항일투쟁 행적은 곧 일제 강점기를 관철했 던 우리 독립운동사의 사건과 인물, 그리고 장면 하나하나를 연결하여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본 사적은 이런 관점에서 우선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전북 무장의 역사적 상황을 소개하고자 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3.1운동의 역사적 발생 배경도 설명이 필요하지만, 고창군 무장면의 지역 적 상황에서 식민지 통치가 어떻게 교육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고 인권을 무너뜨렸는지, 또 그 반작 용으로 청년층의 독립과 투쟁의지가 어떻게 생성되고 상호 연계되었는지 인과관계를 통해 차분히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초 목표한 만큼은 도달하지 못했지만, 이 글에서는 또한 박영관⋅김영완⋅송주일⋅송흥진⋅타 마자⋅도마리아 등 여러 개별적 인물들이 자신의 고향 혹은 터전인 고창⋅장성⋅광주⋅목포 등의 전라도 지역에서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혹은 이에 도움을 준 다양한 행동 양상들을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상호 연결고리를 갖고 영향을 주고받게 된 경위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다. 주지하다시피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지역에서는 단일한 항일 무장투쟁조직이 건설되었다. 여기서는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과정을 겪으며 변화했고 국내와는 또 어떻게 소통했는지도 소개해보려 했다. 이는 통군부에서 통의부를 거쳐 정의부로 변모해간 남만주지 역의 통의부와, 박영관 선생이 가입한 국내 조인현의 통의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 조인현의 통의부가 이리동척지점 습격을 목표로 삼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당시 나석주의 경성동척지점 폭파기도는 국내외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이런 분 위기가 조인현 조직의 항일투쟁 목표설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걸 음 더 나아가, 이리지점은 당시 일본으로 수출되던 전체 미곡량의 절반을 차지했던 전북지역 경제수 탈의 총본산이었다는 점에서 경성지점과는 또 다른 지역적 특수성이 있었다. 경성지점 습격이 상징 적이라면 이리지점 폭파 기도는 보다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리 지역이 역사적 으로 어떻게 변모, 발전해나갔는지를 알아보는 과정도 필수였다. 한편 본 책자에서는 박영관 선생의 법정판결문 기록과 당시 언론보도에 대해 나름대로의 분석을 시도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전방위적으로 수탈하고 억압했는데, 언론 통제와 사법제도 역시 그 와 맥락을 같이 했다. 따라서 언론 보도를 세밀히 분석하고 난해한 법조문을 힘주어 들여다보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