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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9 맺음말 송와 박영관 선생은 1899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에서 밀양박씨 규정공파 26세로 출생하였 다. 무장은 전통적으로 인근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기질도 억세서 지역정체성이 매 우 뚜렷한 곳이었다. 게다가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로서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의 대접주인 손화중 의 세력권이어서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처절하게 대변하는 지역이었다. 선생은 선천적으로 명민한 데다 이런 지역적 특성까지 몸에 배어 3.1운동의 지도자로 만세운동의 대열에 앞장선다. 선생은 3.1운동의 여파로 비록 쫓기는 몸이 되어 전남과 목포 지역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게 되었지 만, 이로 인해서 송주일과 오석완 등 장성의 항일애국지사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특히 1923년 3월 목포에서 남만주 독립군 대한통의부 소속 조인현을 만나 통의부 단원이 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마련 한다. 선생은 전남 지역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문서 및 지폐 위조에 가담한 죄목으 로 목포형무소에서 일정 기간 수형생활을 했다고 보여진다. 한편 통의부 단원 조인현은 1927년부터 전라남북도에서 본격적으로 조직원을 모집하고 총기와 폭탄물 제조를 준비하는 한편, 이를 위한 군자금 모집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이는 결국 이리동척지 점을 습격하여 폭파시킨다는 계획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여기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오석완⋅정기환 등 전남에서 활약하던 인물들과 전북 김제의 노조 및 신간회에서 활동하던 전기환⋅오오득⋅김종철 ⋅조순식 등 다수의 청년들이 참여하여 통의부 단원을 주축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이룬다.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침탈을 위한 첨병으 로 설립되어 경성을 비롯한 전국에 10개의 지점을 두었다. 특히 전북 지역은 이리동척지점을 정점으 로 1920년대부터 수리시설과 농지개간을 통해 막대한 식량증산 목표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서 일본인 대지주의 이익은 극대화되는 반면, 우리 농민들은 농노로 전락하거나 땅을 빼앗겨 유리걸 식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이에 1926년 나석주의 경성동척지점 폭파 기도를 계기로 이리동척지점 습격 및 폭파도 현실적 목표가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인현의 비밀조직은 군자금 마련을 위한 토지문서 매매 과정에서 정체가 드 러나고, 1928년 6월 초에 일제히 검거된다. 이로써 박영관 선생도 장성의 자택에서 권총과 탄약을 압수당하고 체포되어 8명의 동지들과 함께 2년 가량 모진 고문과 취조를 당하게 된다. 선생은 193 0 년 3월에서야 최종 법정에서 1년의 형을 언도받고 수감생활을 한 끝에 그해 10월 출소한다. 이로부 터 조직은 와해되고 동지들은 모두 요절하거나 소식이 끊기게 된다. 하지만 선생과 동지들의 투쟁은 3.1운동 이후 민족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의 디딤돌로서 그 역사적 소명을 다한다 . 선생은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거의 반신불수 상태에서 출소하여 장성에 은거한다. 이어 뒤늦게 혼인하여 두월리에 다시 터전을 마련하고 7남매와 함께 평온한 반평생을 보낸다. 선생은 타고난 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