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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3 박영관의 선대와 가계의 전승 밀양박씨숙민공파종명계가승보(密陽朴氏肅愍公派宗溟系家乘譜), 2007(이하 ‘가승보’)에 의하면, 송와 박영관(松窩 朴永寬)은 1896년 병신년(丙申年) 7월 7일, 박형규(朴瀅珪, 1863~1910)와 옥천설 씨(玉川薛氏, 1860~1905) 부인 사이의 3남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박형규의 자(字)는 경삼(慶三), 호(號)는 수음정(樹陰亭)이다. 그런데 박영관 관련 여러 안내책자나 비문에 그 부친의 이름이 ‘박경 삼’으로 표기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자(字)를 이름처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영관 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승보에는 그 이름이 항렬자인 종(鍾)자를 따라 ‘종인(鍾寅)’으로 되어 있는 데, 그렇다면 자(字)인 영관(永寬)을 나중에는 이름처럼 쓴 것이다. 물론 박영관의 경우, 독립운동으 로 일제에 쫓기는 과정에서 본명이나 자(字) 혹은 제3의 이름인 박성영(朴性永)을 상황에 따라 임의 로 선택해 사용했다. 참고로, 조선시대 남자 양반의 경우 본명은 주로 족보나 공문서에서만 사용했 다. 대신 어린 시절에는 아명(兒名)을 썼고, 성인이 되면 부모가 지어준 자(字)를 친근한 호칭으로 사용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주로 스승이나 웃어른, 친구, 혹은 자신이 지은 호(號)를 불러주었다. <밀양박씨 숙민공파 가승보의 박영관 기록> 한편 가승보에는 박영관의 생년이 병신년(丙申年)인 1896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외 대부분의 책 자와 기록에는 1899년으로 쓰이고 있어 이 또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인적사항에 의하면, 전북폭발탄사건으로 판결을 받았던 1930년 3월 당시의 나이가 ‘35 세’로 되어 있어, 공식적인 생년이 1896년으로 쓰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또 1899년생으로 되어 있어, 현재는 이것을 공식 출생 년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그의 맏형 박종내(朴鍾乃, 1886~1962)와 둘째형 박종선(朴鍾先, 1888~1966)은 모두 박영관보다 10여 년이나 연상인데, 이로 미루어보면 얼핏 1899년보다 가승보에 기재된 1896년이 신빙성 있게 보인다. 어쨌든 1899년생을 인정한다면, 박영관은 7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따라서 그의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10년 이상 터울인 두 형과 형수들이 부모 역할을 대신해주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