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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영관의 출소 이후 행적 ∙ 133 이런 이유로 조인현의 존재와 증언 여부는 통의부는 물론, 이리동척지점 습격 계획의 전모를 밝히 는데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불온한 시대의 한계로 그가 보냈을 법한 소중한 편지 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만약 그 편지의 사본이라도 있었다면, 그 편지의 주인공 이 조인현었다면, 또한 가장 어렸던 그가 1980년대 이후까지 무사히 생존해 있었더라면 어떤 인연 이 더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조인현 외에 또 한사람 언급이 필요한 이름은 바로 담양 출신의 정기환이다. 사실 그는 정기환보 다도 정균호가 더 공식적으로 많이 쓰인 듯하다. 박영관의 동지들은 대부분 40이 되기 전에 사망했 고, 40을 넘긴 오오득 역시 1950년에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박영관과 더불어 정기 환 두 사람만이 70세 이상 장수하였고, 정기환은 80을 넘어 90세의 수복을 누렸다. 담양과 장성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고을이니, 아마도 두 사람은 전북폭발탄사건 최후의 생존자로 서 틀림없이 생전에 모종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기환은 이미 본 사건 이전에 3.1운동 으로 1년, 의창단 조직원으로서 군자금모집과 총포화약류 소지, 그리고 유가증권 위조 죄목으로 무 려 3년, 도합 4년의 징역을 산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도 1930년 출옥 이후에는 어떤 이슈가 될만 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기환과 박영관은 전남에서의 군자금 모집과 문서위조라는 행위의 동질성, 전북폭발탄사 건의 동지, 그리고 이웃한 고향, 오랜 생존과 1977년의 공훈 표창 등등 서로 공통점이 가장 많은 동지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정기환의 존재는 박영관의 목포형무소 복역을 비롯한 전남에서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점에서, 향후 자손들끼리의 유대를 통해 좀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지길 기대해본다. <정균호(정기환)의 별세 부고(경향신문, 1985.4.18.)> 이상으로 박영관 항일 애국지사의 출소 후 행적에 대해, 그의 장손이자 (사)송와박영관기념사업회 박동규 회장의 구술과 전달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해보았다. 송와 박영관 선생은 1975년 10월 19 일 향년 77세로 영면에 들었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1977년 선생에게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은 봉분례 여사와의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