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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그는 남들이 갖지 못한 비상한 능력도 있었다. 그가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체포되어 선고받은 죄목 은 불법무기소지 외에도 문서위조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문서와 관련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모든 문서가 한자투성이인데다, 일제강점기에는 일 본어까지 섞여서 더욱 어려웠다. 굳이 판결문처럼 전문적인 문서가 아니더라도 지역 농민들에는 간 단한 문서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박영관은 수시로 대서소(代書所)를 오가며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 의 편의를 봐주었다. 물론 대서소의 업무를 대신해주면 정당한 대가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박영관은 예술적 감수성과 재능도 천부적으로 타고났다. 시조를 능숙하게 읊었고 북도 잘 쳤으며 퉁소와 단소도 잘 다루었다. 또 집안 화단에 정자를 지어 지인들을 초청하고 한시를 읊기도 했다. 선비가 학식과 위엄을 갖추고 여기에 예술적 재능까지 보태지면 어디서나 도포자락 날리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인데, 송와 박영관은 여기에 항일 투사로서 불굴의 절의도 있어 그 위상이 더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일제가 물러가고 한국전쟁도 지나간 1955년, 박영관은 수리조합 초대 평의원으로 추대되었다. 이 후 정치에도 잠시 뜻을 두어 이승만 정권 시절 민의원(民議院) 선거에도 출마했지만, 당시는 워낙 금권선거가 판을 치던 시절이라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9표 차로 낙선을 하였다. 이후 그는 또다시 선거에 나서지는 않았다. 효심과 지성으로 얻은 천하의 명당 박영관은 기우채(奇宇采)가 서문을 쓴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1957)과 김원익(金源益)이 엮은 장성윤강록(長城倫綱錄, 1971)의 효행편에도 그 이름이 올라 있다. 사실 그는 효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부모님이 오래 사시지도 못했다. 7세 때 어머니 옥천설씨의 상을 당했고, 12세 때에는 아버지 마저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강록과 윤강록에 효자로서 이름을 올린 까닭은 무엇일 까. 어릴 때 부모를 여읜 게 너무도 한스러워 부모님 생전에 못다한 효성을 사후의 부모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박영관은 출소 이후부터 줄곧 부모님 묘소를 명당 자리로 옮겨드리려고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 이런 그의 지극한 간절함에 대해서는 이미 주변사람들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어느덧 회갑을 넘긴 그는 1960년대부터는 아예 풍수를 잘 보는 지관(地官) 한 사람을 집에 들여놓고 전국의 명당을 함께 찾아다녔다. 그런데 그 지관이 애써 어느 한 곳을 점지해놓으면, 박영관은 다음에 은밀히 다른 지관을 데리고 가서 그 자리를 확인하는 식이었다. 이러다보니 어언 10년이나 찾아 헤메었어도 하늘이 점지해준 명당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흔히 풍수가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천하의 명당 자리는 본인이 쓰려 남겨두고 절대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박영관과 10 년을 함께 한 지관은 결국 그의 효성에 탄복하여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