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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영관의 출소 이후 행적 ∙ 129 에게 어린 딸을 시집보낸 장인 봉남중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다. 봉남중은 성품이 평소 착실한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다소 지나쳐서 남들에게 자꾸 사기를 당했다 고 한다. 이에 주위의 권유로 똑똑한 사위를 맞으려다보니, 비록 가진 것 없고 나이도 많지만 명석하 고 올곧은 품성을 지닌데다 주위로부터 위엄과 신망도 높았던 박영관이 낙점된 것이었다. 이런 곡절 끝에 장가를 든 박영관은 부인 봉분례와의 사이에서 뒤늦게라도 3남 4녀의 7남매를 두어 남은 인생 을 평온하고 다복하게 꾸려갈 수 있었다. 지역 유지로서의 공헌과 평등사상에 기반한 사회활동 박영관은 출옥 이후에도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장성의 24인 별기열사들과 함께 세금 불납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또한 학식과 소양을 갖춘 지역 유지로서 장성의 명문가 집안과도 활발한 교유관계를 맺었다. 지역 명망가들은 물론, 학교장이나 관공서 기관 장들도 부임할 때면 으레 두월리로 인사를 왔고, 때문에 그의 집은 언제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박영관의 말년 모습> 박영관의 벗들은 비단 지역의 유력자들뿐만이 아니었다. 항일 독립운동가로 살아온 이력이 말해 주듯이 그는 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특히 어려운 사람이나 약자에게는 한없는 정을 베풀고 도움을 주었다. 살림이 넉넉지도 않은데다 워낙 손님이 많아 안살림이 힘들었을지언정, 찾아오는 거 지에게도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고 반드시 곡식을 내어주도록 했다. 본인의 생일에는 두월리는 물론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정을 나누었다. 한마디로 그는 어느덧 장성사람이면 누구나 지위고하에 관계 없이 우러러 받드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