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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차량들 때문에 위험하기도 해서 한갓진 동네인데도 정붙이기 어렵게 됐다. 몸이 불편했던 그는 고된 농사일을 거들 수 없었기에 소일삼아 상점을 차려놓고 마을과 소통했다. 지금은 옛집이 헐리고 새집 이 들어서며 낯선 담벼락만 남았는데, 그나마 이 담벼락을 바라보며 예전 점방의 출입문이 있던 흔 적이라도 가늠해보는 게 위안이다. 뒤늦은 혼인과 함께 찾아온 평온 박영관의 독립운동 공훈조서에는 그의 생년이 1899년으로 되어 있지만, 집안의 족보나 1930년의 법정 판결문 기록에는 이보다 3년이 빠른 1896년으로 되어 있다. 과연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 지만, 일단 나중에 본인이 인정하고 사용한 1899년생을 따른다면, 그는 출옥 당시 우리 나이로 32 세였다. 그는 1919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쫓겨 20대를 온통 도피와 수감생활 로 일관했다. 따라서 정상적인 혼기를 어느덧 훌쩍 넘기게 되었는데, 출옥 후에도 그는 무려 6년 동안이나 혼자 살다가 드디어 마흔이 다 되어갈 무렵인 1936년에서야 천생배필을 만났다. <박영관과 봉분례의 혼례 사진(1936년)> 그는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남계에 거주하는 하음봉씨 봉남중(奉南仲)의 딸인 1919년생 봉분례와 뒤늦게 결혼했다. 신랑 신부는 나이가 각각 38세와 18세로 무려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이는 두 사람 모두 초혼이라고 보기에는 누가 보더라도 다소 의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흔 다 된 노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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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