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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보통 그들이 행한 고문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곳에서 자주 등장하여 어느 정도 우리 눈에도 익숙 하다. 그런데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익숙히 보아 왔다. 그런데 가죽조끼나 손가락 전기골무 고문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죽조끼란 말 그대로 가죽조끼를 입혀 욕조로 밀어넣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물 먹은 가죽조끼가 가슴을 압박해 숨을 조여오는 고통이 뒤따랐다. 그야말로 악마가 따로 없 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이 고문을 당하고 나면 생니마저 뽑히고 머리도 하얗게 센다고 한다. 또 손가 락 전기골무는 열손가락에 골무를 끼운 뒤 전기를 통하게 하는 것으로, 상상만 해도 끔찍한 고문이 다. 이런 고문들을 당하면 누구라도 없던 죄도 만들어 불거나 무고한 지인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생을 보낸 은신처의 흔적 박영관은 1930년 10월 출소 이후 그가 체포될 당시 살았던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로 돌아가서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마쳤다. 그가 처음 이곳에 살게 된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근의 삼서면 수양리에 거주하던 동지 오석완의 주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처음 장성으로 왔던 시기는 대 략 1926년~27년 경으로 추정된다. 오석완이 조인현으로부터 받은 권총과 실탄을 그에게 건네준 것이 1927년 5월 28일인데, 그는 그 무기들을 집뜰의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다. 따라서 적어도 1927년 5월 이전에 장성에 정착했던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면, 당 연히 장성으로 오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박영관이 반평생을 보낸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의 거주지> 박영관은 장성에 처음 거주할 때부터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체포된 두월리 947번지 외에도 그의 은신처는 여러 곳이 더 있었는데, 이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언제든 수시로 옮겨 다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