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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영관의 출소 이후 행적 ∙ 123 8 박영관의 출소 이후 행적 – 유유자적으로 보낸 반평생 박영관이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전주형무소에서 출감된 것은 1930년 10월 13일 오 전 7시 30분이었다. 그가 장성에 파견된 이리경찰서 경찰들로부터 오석완과 함께 체포된 때가 1928 년 6월 4일이었으니, 이로부터 만 2년 4개월 9일만이었다. 오랜 기간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던 박영 관에게 출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겠지만, 실상 그의 몸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거의 반신불수와 같은 불편한 몸으로 그동안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이 남은 반평생을 견뎌내야 했다. <박영관과 송시용 2인의 출옥을 알리는 기사(동아일보, 1930.10.15.)> 수감 중 경험한 온갖 잔혹한 고문 박영관이 전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일제 경찰들로부터 당한 고문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악질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고문들은 당시 전국 어느 형무 소건 수감된 항일 독립투사들이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고통이었다. 생전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가 당한 대표적인 고문은 가죽조끼⋅손가락 전기골무 고문⋅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물 붓기⋅손 톱 빼기 같은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하수인이 되어 독립투사들을 고문한 조선인 앞잡이들은 광 복 이후에 또다시 대한민국 경찰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갈고 닦은 과거의 고문기술로 이승만 정권 에서는 사상범을, 그리고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에서는 반정부 인사와 운동권 학생들을 소위 ‘빨 갱이’ 취급을 하며 잔인하게 고문했다. 노덕술(盧德述) 같은 이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