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page

122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사태의 결과 많은 학생들이 잡혀가고 학교들에는 11월 9일까지 임시 휴교 처분이 내려졌다. 일제는 즉각 보도통제를 실시하는 등 언론보도를 금지시켰고, 이에 신간회 본부는 진상조사와 학 생들 석방을 교섭하기 위하여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특파하였다. 시위운동은 점차 광주를 벗어나 전 라남도의 각 학교로 파급되었고, 더 나아가 12월부터는 서울시내 각 학교와 시내 곳곳에 광주학생들 을 격려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서울 학생들의 항일 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체 참가 학교가 194개, 학생 수 5만 4,000여 명이었으며, 퇴학과 무기정학 및 피검자는 모두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으로 우리 독립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대한통의부 국내 조직이 일제의 첨병인 이리동척지점 폭파를 기도했던 이른바 전북폭발탄사건은 1920년대 후반 전북지역 뿐만 아니라 전 조선인의 항일 투쟁의지를 고양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3.1운동에서 지펴진 항일 무장투쟁의 불꽃이 사그러들지 않고 만주와 한반도에서 여전히 활 화산처럼 지속된 반증이자, 계속해서 전북에서 전남으로 이어져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같은 대규 모 항일민족운동을 견인한 디딤돌이 되었다. 사건이 비록 미수에 그친데다 박영관을 비롯한 관련자 9인 모두 2년 이상 수감되면서 세상사람들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져갔지만, 이렇게 뒤늦게나마 그 사적을 더듬어 정리해두려는 것도 바로 그 불꽃과 디딤돌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우 차원에 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