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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121 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 2,400여 면에 공립과 사립 보통학교는 1,544개가 있을 뿐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4월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이경채 학생이 ‘조선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퇴 학을 당했고, 이에 6월 동맹휴교가 일어났다. 8월의 전라남도소년연맹사건은 바로 전라남북도에서 일어났던 이런 일련의 항쟁과 일제 탄압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1928년에만 전국적으로 83건의 항 일 학생운동이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호남지방은 항일 분위기가 가장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 침내 이런 분위기는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이라는 정점을 향해 타오르고 있었다. 1929년 6월, 광주중학의 한 일본인 학생이 밖에서 한국인들이 개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고 야만 스럽다고 외쳤다. 이 때문에 광주의 한⋅일 학생 사이에 감정이 매우 악화되었고, 특히 광주 주변에 서 기차로 통학하는 우리 학생과 일본 학생들의 관계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결 국 몇 달이 지나서 분출되었다. 10월 30일 오후, 통학기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 후쿠다(福田) 등이 같은 기차 통학생이던 광주여고보 박기옥(朴己玉)⋅이광춘(李光春) 등 여학생들의 댕기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희롱을 했다. 옆에 있던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朴準埰)가 따지자 일본 학생들은 조롱했고, 이는 곧 현장에 있던 한⋅일 학생들 간의 난투극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했다. 여기에 일본인이 사장으로 있던 광주일보가 이 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하자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11월 1일 에도 광주역에서 양쪽 학생들 간의 충돌 사건이 반복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옛 나주역 역사> 11월 3일 일요일은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었는데, 이 기념식은 광주학생운동을 확산시 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광주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 조선인 학생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고, 이 싸움은 두 학교 간의 전면전으로 번졌으며, 일요일임에도 불구 하고 결국에는 광주의 모든 학교들이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상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