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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치안유지법으로 전북 기자들을 검거한 일제 경찰(동아일보, 1928.5.10.)> 전북기자단사건은 호남지방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촉매가 됐는데,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전북 폭발탄사건 관련자의 상당수는 김제지역 노동운동이나 신간회 관련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기자단사 건으로 가열된 항일의지는 폭발탄사건으로 더욱 고양되었고, 이는 다시 언론인들에 의한 항일 보도 가 더욱 거세고 활발해지는 상승작용을 불러왔다. 특히 기자들의 입장에서는 경찰의 폭압에 무력감 을 느낄 수 있던 시점에서 전북 내의 항일무장조직이 대담하게도 이리 동척지점을 비롯한 일제 관공 서 습격을 계획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다. 전북폭발탄 관련 보도들의 머릿기사가 그토록 자극적이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박영관 등의 관련자들이 검사국으로 송치된 지 두 달이 지난 1928년 8월에는 전라남도소년 연맹 창립총회가 경찰에 의하여 금지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라남도 각 지방의 소년운동대표자들이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간담회를 열었는데, 일본 경찰은 이들 대표자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그 후 가혹한 취조 끝에 정홍교(丁洪敎)⋅고장환(高長煥) 등 8명이 중앙의 조선소년총동맹 집행위원장 과 집행위원임을 알아내고 취조 끝에 광주지법 검사국으로 이송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두 달 가까이 광주형무소에서 고생하다가 방면되었다. 이처럼 1928년 봄부터 전북에서 기자단사건과 이리동척 기습계획사건으로 드높아진 항일의식은 서서히 전라남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는 3.1운동과 6.10만세운동 이후, 통치 기구에 협 조할 수 있는 친일 조선인을 만들기 위해 제한된 실무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우리 학생들은 일제 의 우민화 교육정책으로 학교가 부족했기에 기차를 이용해 대부분 먼 거리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