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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119 드는 사기사건에 가담했을리는 만무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오석완은 이 불분명한 사건에 연루되어 1932년 6월 말에 다시 낯선 경성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애석하게도 1년이 채 안된 1933년 5월 16일자로 차디찬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아마도 이 사건이 단순 사기사건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국 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는 등재되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출소 이후에도 박영관의 일부 동지들은 또다시 검거되어 취조를 당해야 했다. 동아일보에는 1930년 9월부터 12월까지 통의부 관련자들이 전북과 전남, 그리고 경남 밀양까지 연계되어 체포 , 취조를 받는 기사가 나온다. 사건의 발단은 전주 노송정(老松町 : 현재 전주시 노송동)에 사는 김일주 (金日柱)와 한종갑(韓鍾甲)⋅이현석(李賢錫) 등 3인이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는 투서로부터 시작되었 다. 그런데 이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과거 김창숙의 경북 유림단사건과 관련 있던 경남 밀양 사람 신현태(申玄泰)⋅신현권(申玄權) 형제 등이 지목되어 밀양에서 전주 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 게다가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12월 22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과거 전북폭발탄사건 관련자들이 다 시 소환되어 취조를 받아야 했다. 당초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최초에 체포되었다가 방면되었던 원월봉 (元月奉)을 비롯해서, 이미 형기를 마치고 나온 조순식⋅오오득⋅김종철 등이 검거되었고, 출옥 후 재수감되어 있던 전기환, 그리고 심지어 수감 중인 조인현까지도 문초를 받았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들이 통의부와 관련된 비밀결사로 의심을 사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은 정확한 물증이 없어 흐지 부지 종결된 듯 하지만, ‘조인현-통의부-이리동척-경성동척-나석주-김창숙’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 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향후 보다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6) 전북폭발탄사건의 영향 1928년 6월, 흔히 이리동척사건으로도 불리는 전북폭발탄사건은 대한통의부 산하의 국내조직에 서 이리동척을 습격, 폭파시켜려 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비록 미수에 그치고 관련자들이 모두 체 포됨으로써 조직 또한 와해되었지만, 이 사건은 동척이 식민지 조선에 있어 경제수탈의 정점이라는 것을 국내외에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대로 일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 한 트라우마를 겪으며 재발 방지를 위해 비밀 경찰의 탐지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항일 인물과 단체 에 대한 검거 및 배후세력 차단에 전력을 기울였다. 전북 지역에서는 전북폭발탄사건 일어나던 시기에 조선 민중과 지식인을 일깨우는 또 하나의 중 대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북기자단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28년 4월 임실에서 개최 된 전북기자대회에서 신간회 활동으로 일제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된 동아일보 배헌(裵憲) 기자가 대회 시작과 더불어 연행되면서 시작되었다. 명목은 기자대회 발표 문건이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다 는 것이었다. 결국 대회는 양측의 타협으로 어렵게 끝마쳤지만, 이를 계기로 5월에는 도내 각 지역 에서 활동하는 기자들 가운데 항일의식이 강했던 간부진들 11명이 검거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