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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장성군 삼서면 수양리의 오석완 집터(현재는 밭)> 오석완은 본래 고향이 장성이지만, 무장에서 도피해 목포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박영관은 아마도 목포형무소 복역 후 오석완의 권유로 연고가 전혀 없던 장성에 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영관 에게 있어 장성 사람 송주일과의 만남은 동향의 송흥진을 거쳐 오석완에게까지 연결되었다고 짐작 되는데, 특히 대한통의부 소속 동지로서 목포형무소와 전주형무소 복역은 물론이고 장성을 고향으로 삼게 되기까지 오석완과의 인연은 그 누구보다도 각별했다고 할 수 있다. 장성의 별기열사 24인 명 단에도 두 사람이 똑같이 들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석완은 1933년 5월 16일자로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망기록 외에 그가 어떤 사유로 다시 검거되어 수감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는 것이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오석완과 관련 된 사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의 1932년 6월 30일자 기사를 근거로 이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성국(趙聖國, 60세)이라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군산에서 3대 과부로 유명한 김성녀(金姓女, 41)의 돈 14,000원을 위조지폐의 자본금 명목으로 얻어서 다 써버렸다. 이에 그는 김제의 몇몇 지 인들, 그리고 전남 장성군에 사는 오석완 등과 공모해서 위조지폐를 얻는다고 다시 800원을 편취했 다. 이미 두 달 전에 있었던 이 사건은 경성의 서대문경찰서에 발각되어 4월 20일에 경성지방법원으 로 넘겨졌는데, 당시 범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된 오석완은 경찰의 체포를 피해 장성 본적지에 숨어 있었다. 이에 서대문서에서 뒤늦게 탐지하고 수일 전에 체포해갔던 것이다. 이 기사가 보도된 6월 30일은 체포된 모든 관련자들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된다는 날이었다. 이 사건이 단순 사기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조성국과 그 일행들이 독립운동같은 또다른 목적을 위 해 종교의 외피 아래 부호인 김성녀를 속이고 위조지폐를 만들려 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대한통의부 단원이자 항일 지사인 오석완이 그저 단순히 지인의 부탁이라고 위조지폐를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