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page

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117 으며 오랜 기간 농정 및 경제전문가로 활동했다. 또한 송시용의 고종사촌 노일환(盧鎰煥 , 1914~1958)은 배제고보와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고,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민주당 소속으로 전북 순창군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 후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 ’ 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는데, 항소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하여 북에서 활동하다 1958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묘는 평양 용성구역의 재북인사 특별묘지에 있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박영관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오석완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 오석완은 목포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고향인 장성에 은거하다가 전북폭발탄사건으로 박영관과 함께 1928년 6월 4일에 체포되었다. 이에 1930년 3월 12일 최종심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30년 6월 15일에 만기를 채우고 출소했다. 오석완의 출소와 관련해서는 당시 언론에서 다른 사람과 착각하여 이름을 잘못 내보낸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출소가 처음 보도된 신문은 시대일보의 후신인 중외일보(中外日報)로, 이 신문의 1930년 4 월 18일자에는 전기환⋅조순식⋅오석완 등 3인이 4월 15일에 만기출소했다고 되어 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또한 4월 22일자에서 위 3인의 4월 15일 출소 소식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신문은 정기환 대신 오석완의 이름을 잘못 내보냈다. 왜냐하면 김종철⋅오석완⋅오오득 3인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전기환⋅조순식⋅정기환은 6개월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5개월의 미결구 류일수를 감안하면 앞의 세 사람은 1930년 6월, 뒤의 세 사람은 1930년 4월이 되어야 만기출소가 가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해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는 전기환⋅조순식⋅정기환 등 3인의 만기출소 기사 가 제대로 실려 있다. 또한 중외일보의 6월 15일자 기사에는 다시 김종철⋅오석완⋅오오득 3인이 전주형무소에서 만기출소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는 두 달 전 자신들이 오석완 이름으로 잘못 내보낸 것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아마도 4월 22일자 매일신보는 몇일 앞서 보도된 중외일보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이런 실수조차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언론의 베껴쓰기 관행은 여전한 것 같다. 어쨌든 오석완은 1930년 6월 15일 출소 이후 고향인 장성에 은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영관 역시 6개월 뒤에 출소해서 장성에 머무르고, 이후 이곳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된다. 두 사람은 192 8 년 6월 체포 당시에도 이곳에 적을 두고 있었다. 최종판결문에 명시된 오석완과 박영관의 주소는 각각 장성군 삼서면 수양리와 삼서면 삼계리(체포된 곳은 두월리)인데, 오늘날 두 사람이 머물렀던 집터를 가보니 함동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지근거리에 있었다. 참고로, 함동저수지는 1944년에 착공하여 1957년에 완공했는데, 이는 전라남도에서 3번째로 큰 저수지라고 한다. 물론 이 때문에 1920년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현재는 알아볼 도리가 없어 아쉽기도 하다.
123page

8. 박영관의 출소 이후 행적 ? 유유자적으로 보낸 반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