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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송시용은 1938년에 젊은 나이로 사망했는데, 판결문에는 이미 사망한 조부 송상희(宋相熙)의 토 지문서를 위조해 대금을 편취하려 한 사건이 매우 장황하고 상세하게 나와 있다. 송상희는 배재학당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를 졸업한 김제의 유지로서, 여수군수와 고성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송시용의 부친 송재기(宋在驥)도 지역의 유지였고, 이런 영향으로 송시용은 젊어서부터 김제청년회에서 강연 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역 민원해결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는 박영관과 함께 10월에 출소했는데, 불과 두 달 뒤에 김제경찰서 고등계에 소환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때 그는 동아일보 김제지국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자세한 행적을 알 수는 없으나, 동아일보 7월 13일자 기사에는 그가 경성 광화문의 고려호텔에서 급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하지만 그의 사망 원인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송시용과 관련하여 1925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와 사진 하나가 실려 있다. 기사 내용을 보면, 수백 명의 소작인을 둘 정도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부터 경성 과 동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돌아왔다. 그랬던 그가 노동의 고귀함을 몸소 깨우치겠다고 이해 3월부터 전주에 와서 초라한 차림으로 구루마를 끌었던 것이다. 당시 그는 25세로, 미국 유학도 포 기하고 낮에는 구루마, 밤에는 교편을 잡고 조그만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기사에 의하면 그는 어려 서부터 사회의 모순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에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불만으로 자살을 기 도하기도 했지만, 블라디미르 레닌의 말에 용기를 얻고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이로써 그의 성장과 정에서의 방황과 기행, 그리고 사상편력을 엿볼 수 있다. <전주에서 구루마를 끄는 송시용의 모습(조선일보, 1925.8.13.)> 참고로 송시용의 배다른 동생 송방용(宋邦鏞, 1913~2011)은 연희전문 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향 김제에서 문맹퇴치교육에 앞장섰다. 이후 그는 국회의원을 거쳐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역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