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page

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115 김제노동조합장 전기환은 1930년 4월에 출옥했지만, 석달 뒤인 7월에 사상 불온죄로 다시 체포 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 끝내 고문후유증으로 이듬해인 1931년에 사망하였 다. 김종철은 본 사건으로 6월에 출옥했으나 역시 고문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데 이어 한쪽 눈까지 실명되는 고통을 겪다가 19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9세에 불과했다. 또한 박영관의 평생 동지 오석완 역시 6월에 출소했으나 행적이 묘연하다가 1933년 5월 서대문형 무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오석완의 출소 후 행적과 그가 다시 체포되는 정황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추가로 설명하겠다. 오오득은 전기환보다 2개월 늦은 6월에 출소하여, 전기환이 7월에 체포되자 그 지위를 이어받아 김제노동조합장이 되었다. 그는 1931년 10월 김제역 앞에서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다시 체포 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여 1933년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 월의 형을 확정받고 1934년 6월에 만기 출소하였다. 광복 후에도 그는 김제를 대표하는 농민운동가 로 활동했지만, 좌익인사에 대한 대한민국 경찰의 탄압이 거세지자 고향에 잠적한 뒤 1950년 5월에 사망하였다. 조순식은 본 사건으로 입건되기 이전부터 김제지역에서 청년회 활동과 신간회의 김제지회 부회장 으로 매우 활발히 활동했고, 출옥 후에도 동아일보의 김제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활동 영역이 매우 넓었다. 그런데 그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현재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다만 동아일보에는 1930년 이후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의 양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의 동상설립 발기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한 1934년 6월의 기사, 그리고 동아일보가 주관하는 제13회 전조선여자 정구대회의 행사 본부에 참석한 1935년 9월의 기사가 있다. 따라서 그가 최소한 이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순식(좌)과 전기환(우)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