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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었고, 음력 9월 30일 경에는 다시 김제 청년 김종철의 집에서 그를 설득해 통의부 단원으로 가입시 켰다. 김종철은 이듬해인 1928년 음력 2월, 조순식으로부터 오오득에게 갓 건네진 권총 1자루와 실탄 13발의 보관을 부탁받고 이해 6월 3일까지 자택에 소지하였다. 한편 송시용은 1928년 3월 12일 경, 고인이 된 자기 조부 명의의 토지를 실질적으로는 자기 소유 라고 속인 후 매매에 앞서 1730원을 편취하였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돈은 조인현 이 이리 동척지점 습격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인 것 같다. 1930년 3월 4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결국 송시용은 1928년에 이 일로 인해 이리 익산여관에서 불미스런 격투를 벌였다. 그가 이 토지매매 건으로 일본인 도쿠시마 토요시(德島豊吉)를 만난 때가 1928년 3월 12일이었으니, 격 투사건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때 일어난 듯하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조인현과 송시 용의 정체가 탄로나는 데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 조인현은 박영관을 제외하면 나머지 관련자들을 대체로 모두 1927년 음력 5월에서 음력 9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나서 조직화를 시도하고 총기와 실탄을 건넸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리 동척지점 습격은 1927년 가을 경에 실행될 예정이었다고 추정된다. 조인현은 거사 자금을 조달하려 고 기계까지 설치해서 위조지폐를 찍어내려 했고, 폭탄 제조를 위한 기술사까지 초빙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석완이 그즈음 위조지폐의 밑천이 되는 돈 몇천 원을 마련하 려다 체포되어 8개월형을 선고받았고, 이때문에 조인현은 그의 출소를 기다려 1928년 6월 이후 작 전을 개시하려 했다. 하지만 정작 오석완은 출소를 했는데 그만 조인현 자신이 체포됨으로써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5) 사건 관련자들의 출소 이후 행적 앞에서 우리는 전북폭발탄사건 관련자들의 인적사항을 간략히 표로 정리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표의 마지막 부분에 표시한 9인의 사망 연대를 보면, 이들이 출옥 후에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 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어 안타깝다. 조인현과 조순식은 알 수 없다 치더라도, 박영관과 정기 환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은 모두 45세 이전에 사망하였고, 그나마 오오득을 제외한 4인은 40세 이전 에 생을 마감하였다. 본 책자에서는 이들 모두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록하는 데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들의 출소 전후 행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박영관과 조인현, 그리고 오석완⋅정기환 등의 체포 이전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또한 박영관의 출소 후 행적은 다음 장에서 별도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만 본 사건의 주모자인 조인현의 경우 최종 재판 후 항소를 했지만, 이후 그와 관련된 기록이 없어 항소의 전개과정과 출소일은 물론, 출소 이후의 행적조차 전혀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만약 항소가 기각되어 예정대로 4년을 복역했다면, 그는 아마도 박영관보다 만 3년 늦은 1933년 10월에 출소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