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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호남 최초 순국 의병, 정시해 의사 초상화> 1907년 정미년 헤이그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그와 거의 동시에 대한제국 군대 가 해산되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해산 군인들까지 합세한 전국규모의 의병항쟁, 즉 정미의병이 일 어났다. 이들은 1908년 1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의병들은 지역별로 분산, 독자적인 항일 유 격전을 수행하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호남 정미의병의 중심인물은 기삼연(奇參衍)으로, 그의 의병부 대를 포함한 4~5개의 연합부대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전국 의병항쟁의 중 심 역할을 하였다. 1907년~1909년 사이 호남의병은 모두 4만 4천여 명이었고, 이들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횟수는 1300여 건에 달했다. 1909년 9월, 일본 측은 항쟁의 중심 역할을 하던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약 두 달에 걸쳐 소위 ‘남 한토벌대작전’이라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개시하였다. 일제의 야만적 토벌작전 결과, 이때 체포된 의 병 수는 1600여 명인데 이중 의병장도 103명에 달했고, 420여 명의 의병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무장 지역 출신으로서 정미의병으로 활약했던 대표적 인물은 김만대⋅김상오⋅김영수⋅김응구⋅김 재화(김참봉)⋅서종채⋅신화산⋅안화여⋅오장화⋅이화섭⋅최영만⋅하천일 등으로, 이들은 모두 현 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애국지사이다. 당시의 이들 무장 출신 의병들의 재판기록을 보면, 거의 대 부분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했고 일부는 기결수로서 장기간에 걸쳐 견디기 힘든 옥살이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