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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위 기사를 보면, 오오득과 조인현이 문서를 위조해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당시 오오득은 23세였으니, 미성년의 동생이 있다는 것은 납득이 간다. 오오득과 중개인들은 서로 짜고 문서를 위조하여 오오득 동생 명의의 토지를 제3자에게 매도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동생이 미성년이라 매입 의사가 있는 제3자와의 매매가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중개인들이 이 일로 거금 수백만 원을 썼다는 것은 다소 과장이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이 기사를 신뢰한다면, 오오득과 중개인들 간에 말썽이 일어난 것이 조인현을 비롯하여 전체 조직의 정체가 탄로나게 된 발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시 언론보도와 훗날 재판기록을 토대로 이 사건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이 책에서 는 이미 앞장에서 전북폭발탄사건으로 최종 선고를 받은 9인 중 박영관⋅조인현⋅오석완⋅정기환 등 4인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한 바 있다. 이중 조인현은 의주, 박영관과 오석완은 장성, 정기환은 담양이 각각 그 출신지인데 반해, 나머지 전기환(全崎煥)⋅오오득(吳五得)⋅김종철(金宗喆) ⋅조순식(趙純植)⋅송시용(宋始鏞) 등 5인은 모두 김제에 본적을 두고 있는 인물들이다. 조인현이 이 들 김제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가 친어머니가 있던 군산에 잠복해 몇 년간 정착 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어진 임무와 신분의 특성을 고려할 때, 조인현이 일제에 저항적인 단체 나 사람들과 제한적으로 접촉했을 것은 당연하다. 이 과정을 대략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통의부 소속 조인현은 1923년~24년 무렵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산에서 장재여관 이라는 여인숙을 경영했다. 이로부터 몇 년 간 전라남북도 방방곡곡을 샅샅이 다니면서 정찰을 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는데, 박영관은 적어도 기록상으로 볼 때 조인현이 통의부 단원으로 가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다. 이후 조인현은 1926년 음력 10월 경 전주로 옮겨가서 이발직공을 가장하며 경찰의 눈을 피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인현은 1927년부터 오석완과 정기환 외에도 상기 5인의 김제 인물들과 만나는데, 김제에서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은 김제노동조합원 전기환이다. 조인현은 이들에게 권총과 실탄을 지급하고 이리동척 습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 이때 오석완이 군자금 모집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8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자, 조인현은 그의 출소예정일인 1928년 5월 직후 거 사를 단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오오득이 동생 명의의 토지 문서를 위조해 매매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오오득 자신은 물론, 조인현마저도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된다. 한편 경찰은 요주 인물인 조인현이 군산에서 사라져 그 행방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리서 고등 계 형사가 이리 익산여관에서 오오득을 만나게 되었다. 오오득에 의해 김제와 장성의 동지들 거처가 탄로난 것은 물론이고, 오오득을 취조한 형사는 과거 오오득의 토지매매 사건으로 그와 동지인 조인 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군산에 있던 조인현이 사라져 그러잖아도 애가 타던 시점 에서 오오득이 이리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리서 형사들은 오오득의 김제 가택을 수색한 결과 ‘전주 오해룡(吳海龍)’이란 이름의 엽서가 나왔으므로, 곧 가명임을 짐작하고 전주로 출동하여 조인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