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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영관 출생기의 전북 무장 지역 및 시대적 배경 ∙ 5 이는 텐진조약(1885)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정부에서는 6월 1 1 일 동학군과 전주화약을 맺어 외국군대 주둔의 명분을 제거하려 했으나, 일본은 경복궁을 무단 점령 하여 국왕을 무력화시키고 청일전쟁까지 승리하며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청일전쟁 종군 기자 조르주 비고(1860~1927)의 풍자화> 이에 해산 이후 다시 집결한 10만의 동학농민군은 결국 공주 우금치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 본군과 관군에게 섬멸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으로 1895 년 7월 조선에서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자, 일본은 극약처방으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을미년의 이와 같은 참변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지만, 무장과 고창 지역은 동학혁명 패퇴의 여파로 의병운동에 적극 동참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이제 한반도에서 최후의 적으로 남은 러시아와 일전을 불사하였고 마침내 러일전쟁을 일 으켜 승리하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 통감부의 괴뢰정부로 전락했다. 이때 다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을사의병은 과거 을미의병과 달리 양반 유생 중심의 신분적 한계에서 벗어나 군인, 평민에게까지 광범위한 참여를 촉발시켰다. 을사의병 중 전국 의병항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전북지역에서 활약한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이었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李恒老)로를 정점으로 하는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최익 현 의병진은 태인에서 일어나 정읍, 순창을 점령하고 담양 방면으로 진군했으나, 비록 일본의 영향 력 아래 있다 할지라도 차마 대한제국군 진위대와 동족상잔의 전투를 치룰 수 없어 회피하였다. 그 러나 이 틈을 역이용한 진위대는 최익현의 호소를 묵살한 채 맹공을 취해 의병진을 와해시켰고, 주 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당초 최익현 의진에는 무장과 고창 출신의 의병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 여 맹활약을 했었는데, 무장 출신의 중군장 정시해(鄭時海, 1872~1906)는 이때 호남 을사의병 최초 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