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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위 기사가 동아일보에 보도된 것은 1928년 6월 5일이고, 그 출처는 동아일보 이리지점이었다. 기사 내용에 의하면, 이 사건의 발단은 오오득(吳五得)이 일주일 전, 그러니까 5월 말에 이리에 왔다 가 우연히 이리서에 검거되면서 시작되었다. 오오득의 진술에서 단서를 발견한 경찰들은 그의 집을 수색했고, 여기서 탄환과 현금이 발견되었 다. 이에 오오득을 계속 취조하자 관련자들 이름이 줄줄이 나왔을 것이고, 따라서 경찰은 제일 먼저 6월 2일 김제 방면으로 출동하여 김제경찰서의 지원을 얻은 후 제일 먼저 김제노동조합장으로 있던 전기환(全崎煥)을 체포해 이리경찰서로 호송했다. 이어서 6월 3일 새벽에는 같은 김제군의 신간회 김제지부 부회장으로 있던 조순식(趙純植)과 김제노동조합원 김종철(金宗喆) 등 2인을 체포해서 이 리서로 데려갔다. 이때 김종철의 집에서도 권총과 탄환이 발견되었고, 불온문서까지 압수되었다. 이뿐 아니라 6월 3일 오후 3시에는 또 한 형사대가 이리역발 목포행 열차를 타고 전남 장성 방면으 로 급히 출동했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장성이라면 당연히 박영관과 오석완이 있는 곳인데 , 이들은 사흘이 지난 6월 6일에서 체포되었다. 이상을 다시 정리해보면, 경찰은 5월 말경 우연히 이리에 온 김제군 출신 오오득을 검거하게 되었 고, 취조를 통해 일정 단서를 찾은 다음 가택 수색을 해보니 탄환이 발견되어 이 사건이 매우 위중하 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오오득을 계속 취조하여 관련자들을 색출했고, 그 결과 김제와 장성의 동지 들이 줄줄이 붙잡혀 이리경찰서로 압송된 것이다. 그런데 김종철의 집에서도 권총과 탄환이 발견된 데다가, 불온문서까지 나왔으므로 이 일이 한층 더 중대한 사건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전북폭발탄사건의 발각과 주모자 체포가 언론에 최초로 보도된 것은 오오득이 이리경 찰서에 처음 체포된 시점으로부터 약 1주 정도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이는 일제 경찰이 관련자들을 모두 발본색원하기 위해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대로 당시 일제는 나석주의 경성동척지점 습격사건의 배후를 규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침 이보다 조금 앞선 192 8 년 4월에는 나주석를 국내에 파견한 배후 인물 김창숙에 대한 예심이 종결되어 모든 언론에 대대적 으로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4월 8일자 동아일보는 김창숙에 대한 예심을 보도하는 머리말로 ‘권총과 폭탄을 준비, 무력 운동을 계획’이라고 적고 있다. 즉, 김창숙이 1926년 국내로 잠입해 경상도 유림을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하다 탄로나자 다시 상해로 갔고, 무력으로 전 조선의 항일투쟁을 일깨우기 위해 다수의 폭탄과 권총 등을 준비한 후, 그 일착으로 나석주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척 폭탄투하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나석주의 뒤를 이어 다시 여러 사람들을 보내려 계획했다는 것도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 예심종결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제는 한동안 절대비밀에 붙였다. 아직 그 부하로 체포되지 못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인현과 그 동지들에 대한 단서가 포착된 것은 이처럼 김창숙 재판으로 나석주의 동척 사건이 다시 여론에 환기되던 시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달 남짓 지난 시점인 5월 말, 이번에는 전북 이리를 중심으로 전라남북도에 넓게 퍼져 있는 모종의 항일단체 세력들이 포착되고 이어서 6월 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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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종공판 및 판결문 분석을 통한 사건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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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종공판 및 판결문 분석을 통한 사건의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