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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99 통의부 조직원들이 체포, 공판에 회부되어 복역하게 된 과정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북폭발탄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처음 언론에 보도된 것은 동아일보 1928년 6월 5일자로서, 여 기에는 ‘모 중대사건 발각’, ‘전북에 검거 선풍’, ‘이리⋅김제에서 청년 다수 검거’ 등의 머릿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본 사건과 관련하여 이 기사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있기 때문에, 기사 전체를 현재 표준어로 다소 쉽게 풀고 문장을 끊어서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 중대사건 발각, 전북에 검거 선풍, 이리⋅김제에서 청년 다수 검거 대금(大金)과 탄환을 압수 전북 이리경찰은 지난 2일 밤 극비밀리에 다수 형사대가 전북 경찰부원을 인도하여 인근 김제방 면으로 출동, 김제서의 응원을 얻어서 김제 역전에 있는 모 단체의 간부인 전모(全某)⋅소모(蘇 某)와 김제군 백산면 안모(安某)를 검거하여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서로 호송, 인치했다. 또한 계속 활동하여 3일 새벽부터 김제군 공덕면의 조모(趙某)와 역시 같은 군 백구면 모(某) 등을 속속 검거하여 올 뿐 아니라, 김제군 내의 주의인물들을 샅샅이 감시하는 등 공기가 자못 험악하 여 일반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한편 이리경찰서는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고야(高野) 서장 이하 고등부와 사법부의 양 계의 간부가 등청하고, 따라서 구석구석에 자리를 나누어 취조를 개시하며, 누구를 물론하고 일제히 출입을 엄금하여 대기장을 일으켰었다. 이리경찰서 야기(野崎) 사법계 주임은 말하되, 이번 사건은 절대로 비밀이니 무슨 말이나 대답할 수 없으며, 혹 4~5일이 지나서 는 사건의 정체를 발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또 사건이 전북적(全北的)으로 또는 전 조선 적(全朝鮮的)으로 확대될는지도 모르는데 검거에 착수하였을 따름이니까 일체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일주일 전에 김제군 하리면 오오득(吳五得)이란 청년이 모 사 건으로 이리에 왔다가 우연히 이리서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다가 그의 진술로써 의외로 단서를 발견하고 가택을 수색한 결과, 현금 수백원과 탄환을 발견 압수하였고, 3일 오후 3시에 이리역발 목포행 열차로 또 한 형사대가 전남 장성 방면으로 급히 출동하였다는 바, 내용은 매우 중대한 모양이더라. 팔방으로 대수색, 권총도 압수 사건은 점차로 확대할 터, 불온문서까지 발견 전북 이리에 모 중대사건이 생기어 팔방으로 대수색을 계속하는 동시에, 사상 단원 중 다수의 혐 의자를 검속하였다는 것은 별항과 같다. 지난 3일 오후에는 이리형사대가 김제군 백구면 영상리 김종철(23)의 집을 수색하고 마루 밑에 숨겨두었던 ‘피스톨’ 한자루와 처마 끝에 두었던 탄환 7 발과 불온문서 다수를 압수하고, 이 계획에 쓰던 현금 260원을 압수하였다. 동시에 앞의 김상철 (김종철인 듯)을 체포하여 취조하는 중이라는데, 내용은 저대 비밀에 붙이므로 알 수 없으나, 전 라남북도를 망라한 모 중대사건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더라. (이리 특전) (동아일보, 1928.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