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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97 나석주를 파견해 동척 폭파를 계획한 임정의 수뇌부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경우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1925년 8월, 김창숙은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유림들로부터 대규모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이른바 이 ‘제2차 유림단사건’으로 당시 국내에서는 600여 명이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가뜩이나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에 올랐 던 그는, 1926년의 동척 폭파 사건으로 더욱더 집요하게 추적되고 있었다. 결국 김창숙은 1927년 5월 상해에서 일본인 밀정에 의해 체포,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이듬해 징역 14년 형을 선고받고 7년을 감옥에서 지낸 뒤, 하반신불수로 1934년 10월에서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일제 경찰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독립투사들을 나석주와 연관된 사람으로 의심하여 체포하고 고 문했다. 사건 발생 후 2년째인 1928년 4월의 다음 기사를 보자. 폭탄투척에 찬동한 나석주 공범 2명(기미년 이후 해외 방랑 의열단원), 신의주에서 예심 결정 대정 15년(1926) 12월 28일 대낮 1시에 조선의 중심부이자 왕래가 가장 빈번한 황금정(黃金 町, 을지로입구)과 남대문통에 있는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본점을 단신으로 습격하여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사람을 죽인 나석주 사건은 일시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한것만치 아직까지 기억 이 새롭다. 이 사건의 내용에 있어서는 거사한 후에 곧 자살하여버렸고 오직 최후로써 두어 마디 의 침통한 말을 남겼을 뿐, 도무지 사건의 증거를 얻어 볼 수 없어 경찰은 머리를 앓았다. 그러 던 중 소화 2년(1927) 5월 23일 아침에 중국 북경에서 일본공사관 경찰의 손에 동 사건의 관 련자 이화익(李化翼)과 최천호(崔天浩) 두 사람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의주로 호송 되어 동 6월 27일에 신의주지방법원 예심에 붙인지 만 1년이나 되어가는 지난 13일에 예심이 종결되어 ..... 이것으로 나석주가 소화 2년 12월 20일에 천진에서 이통(利通)이라는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온 것과 .... 주범인 나석주가 죽어버렸으므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는 대단히 곤 란하겠다는데..... (조선일보, 1928. 4. 18) 위 기사에서 언급된 이화익과 최천호는 1927년 5월에 체포되었으나,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예심 이 종결되었다. 이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건 당사자인 나석주가 죽음으로써 수사가 더뎌진 것이다. 게다가 얼핏 보기에도 이들이 정말로 나석주의 공범이라고 볼 증거도 부족해 보인다. 어쨌든 이 기사는 일본 경찰이 본 사건으로 장기간에 걸쳐 골머리를 앓았던 정황을 실감나게 보여주 고 있다. 이런 현상은 박영관을 비롯한 전북 통의부 단원들이 폭발탄사건으로 체포되기 바로 직전과 이후 까지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 대련(大連)에서 체포된 이지영(李志永)이라는 애국지사는 일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