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page

96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따라서 1927~28년 무렵 조인현의 대한통의부가 이리 동척 습격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당시 동척 에 대한 이와 같은 국내외 조선민중의 반일 투쟁적 정서가 반영된 것이었다. 당시 일제도 이런 분위 기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석주가 동척 습격 후 을지로 방면으로 도주하다 끝내 권총 3발을 자신의 가슴에 쏘고 쓰러지자, 경찰들은 그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조치를 하여 살리려고 하였다.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밝히는 것이 일제 경찰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2주 만에야 호외로 처음 알려진 동척폭탄사건(조선일보, 1927.1.11.)> 하지만 나석주는 최후의 순간 경찰의 짧은 취조에 겨우 자신의 고향과 이름만을 밝히고 의열단원 임을 시인한 후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때문에 일제는 이 미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느라 전력을 기 울였고, 이 과정에서 일종의 트라우마까지 겪는 현상이 벌어졌다. 즉, 사건 발생 1달도 채 못 되어서 경찰은 나석주가 사용했던 2개의 불발 폭탄 중 1개를 용산 병기창에서 도화선 접속을 통해 폭파했다 (1927.1.19. 조선일보). 이는 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매우 집요했다. 나석주의 장남 나응섭(羅應燮)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러 왔다가 온갖 고초를 겪고 그 또한 독립투사가 되었다. 일제는 황해도 재령의 본가 에서 계속 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는데, 이윽고 그가 진남포에서 사라지자 중국방면까지 연결하여 종적을 수사했다(1927.6.18. 동아일보). 나응섭은 임시정부 김구의 부름을 받아 백운학(白雲鶴)으로 변성명하고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도중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당한 후 (1927.7.3. 동아일보), 극심한 고문을 받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