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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북폭발탄사건의 배경과 전개 및 영향 ∙ 95 병으로 귀국하여 지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계속해서 황해도 일대 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강탈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다가 결국 1920년 9월에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1926년 천진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그가 또다시 국내로 파견될 때 띤 임무는 동척의 습격이었다. <나석주 열사의 초상과 동상(을지로 입구, 옛 외환은행 본점)> 황해도 재령의 나석주는 본래 비옥한 농토를 소유한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제강점기 가 되자 그의 집안은 동척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그가 동척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과 복수심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석주가 동척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인으로 위장해 입국한 것은 김구(金九)와 함께 상해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 (金昌淑)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곧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식산은행과 동척이 지니고 있는 수탈의 상징성과 대표성에 대해 임시정부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을지로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위치, 과거와 현재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