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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그리고 전쟁에 광분하는 일본 자체의 이익만 늘어났을 뿐 농민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리 동척지점은 무소불위의 권한과 지위를 이용해서 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 농민들을 가차 없이 착취했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익산의 농업은 이리동척지점을 정점으로 해서 줄곧 일제의 식량보 급기지 역할을 수행하였고, 일본의 저임금유지를 위한 식량문제 해결에 이용되었으며, 일본 내의 쌀가격 안정과 외국 쌀 수입 억제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상으로 역사시대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온 익산 주변 고을, 1910년을 전후한 시기 호남선 철도 의 건설과 일본인의 익산지역 이민 유입, 1920년대 이리역을 중심으로 한 익산 지역의 도시화 과정 , 수리조합 건설을 통한 대규모 수로사업과 식량 증산, 그리고 식민통치의 첨병으로서 설립된 이리 동척과 이에 기반한 일본인 대지주의 성장, 여기에 맞섰던 우리 농민들이 저항 등을 비교적 상세하 게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 제기의 원점으로 돌아와서, 박영관을 비롯한 통의부 단원들이 1928년 상황에서 이리 동척을 습격하려고 했던 근본적 원인이 이제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이들의 행동에 직접적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나석주 열사의 경성동척지점 폭파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나석주의 경 성동척 지 점 습 격 사 건 과 그 여파 1928년 6월 9일, 통의부 단원들에 대한 체포 사실을 처음 기사로 내보냈던 동아일보는 이들이 “가장 먼저 이리 동양척식회사 지점을 습격하여 경찰의 주력이 그곳으로 몰린 틈을 타서 각 부호의 집을 엄습한 후 많은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계획하였다.”라고 했다. 만약 이 기사대로라면 통의부 단 원들은 그저 경찰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리동척 습격을 계획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는 한마디로 통의부 단원들을 극악무도한 불법 강도집단 정도로 폄하하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를 당 시 언론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보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리동척 습격 계획은 그렇게 별 생각 없이 단순하게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통의부 단원들이 체포되었던 때로부터 1년 반 가량 앞선 1926년 12월 28일 오후 1시, 중국에서 잠입한 35세의 청년 나석주는 을지로입구 식산은행(현 롯데백화점 본점)으로 유유히 들어가 폭탄 한 발을 던졌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이어서 그는 건너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구 외환은행 본점)로 다시 들어섰다. 총격을 가하며 2층으로 올라가 또 한 발의 폭탄을 투척했지만, 이 역시 불발이었다. 나석주는 을지로 2가 방면으로 달아나며 경찰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끝내 자기 가슴에 3발의 총을 쏘고 자결하였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당시 나석주의 총에 맞은 일본측 피해자는 사망 4명, 중상 2명, 경상 2명 등 모두 8명이나 되었다. 황해도 재령 출신의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제에 의해 조선의 주권이 강탈당하자 1913년에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어머니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