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4 ∙ 송와 박영관 선생 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어 ‘고창 무장동학농민혁명 기포지’라는 공식 명칭을 지니고 있다. 한편 여기서 남 쪽으로 약 2km 남짓 떨어진 공음면 개갑장터 옛터는 전라남북도 일대의 사람과 물자가 모였던 중간 기착지로서, 당시 장꾼으로 위장한 농민군들이 모여들어 훈련했던 무장기포의 배후지였다.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1894년 1월 고부봉기 이후 관군을 피해 무장으로 왔다 . 무장 구수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20km쯤 떨어진 고창의 당촌마을은 본래 전봉준 일가가 대대로 살 던 곳(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63)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으나, 10대 초반에 태인 등지로 이주했다가 마지막으로 고부에 정착해 살았다.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의 전봉준 생가터> 또한 동남쪽 15km 거리의 무장현 덕림리 양실마을에는 당시 동학농민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의 도소(都所 : 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276-1)가 있었다. 따라 서 전봉준의 입장에서 볼 때 무장 구수내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 외에도, 가까운 친인척들의 도움으 로 인력동원과 물자지원이 유리했을 뿐아니라 당시 대접주였던 손화중의 세력권이어서 동학교도들 을 모으고 훈련시키기에도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전봉준은 1월의 고부봉기 때와는 달리 손화중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마침내 분위기가 무르익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혁명의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었다. 1894년 3월 20일(음력), 구수 내에서 4천명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고창, 흥덕을 거쳐 또다시 고부를 점령한 후 3월 26일 백산 대회를 개최했을 때에는 그 숫자가 2배 정도 늘어난 6~7천 명이나 되었다. 이후 태인 관아를 탈취하 고 여기에 부안, 정읍, 금구, 금산의 농민군까지 가세함으로써 동학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인근 13개 읍을 해방구로 만들었다. 동학군은 이런 저력을 바탕으로 나주까지 내려갔다 북상하며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갈재를 넘어 마침내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했는데, 이때 의 농민군 수는 약 2~3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조선 정부는 초기 동학농민군의 봉기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