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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인협 선생과 남구와의 인연이야기. 홍암 나인협 선생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평안남도에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천도교인을 지도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평양에서 자주국가 건설을 위해 힘썼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하여 부산 법일동 피난민촌에 정착, 노구를 이끌고 국군장병 강연등에 앞장섰다. 1952년 4월 16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영면하면서 지은 임종사에는 선생의 애국정신이 담겨있다. 당시 선생의 빈소는 초량 천도교 부산교구에 마련되었으며, 장의위원장은 오세창, 부위원장은 이갑성, 이명룡 등 민족대표 33인 동지들이 맡았다. 선생의 장례를 위해 정부에서는 전쟁 중임에도 200만원을 장의비로 지원하였으며,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거둬 조의금으로 냈다. 4월 20일 오전에는 부산진역 광장에서 부산시민의 애도 속에 선생의 영결식이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선생의 시신은 대연동 범디산 중턱에 안장되었다.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렬장에 추서되었고, 그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을 이장되었다. 인근 주민들은 성생의 발자취를 기리고자 묘 표지석을 보존해오면서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잊지않고 이어왔다. 2016년에 이르러 범디산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선생의 묘 표지석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두 동강이 났고, 이후 천도교인의 집에서 보관중에 세 동강으로 파손되었다. 선생의 묘 표지석이 훼손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남구에서는 선생의 유일한 족적이라 할 수 있는 표지석마져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복원을 결정하였다. 민족정신을 일꺠우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묘 표지석 복원과 함께 선생의 흉상을 건립함으로써,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지역민의 자부심 고취와 나라사랑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