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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3.1운동은 이날에 폭발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에 저항하여 이를 되찾으려는 우리 온 민족의 비장한 결의를 만천하에 천명한 운동이었다. 남녀노소 빈부 상하의 구별없이 온 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 지축을 울리는 함성으로 만세를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당당히 주장한 운동이었다. 우리는 맨손이요 적은 총칼이 있으나 이에 굴함없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을 하늘에 맹서한 우리 겨레의 살과 뼈에 선혈이 튀는 통분한 싸움이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한 이 운동은 피바람에 실려 삼천리 산과 들에 펴졌으며 이해 3월 29일에는 우리 서천고을 월명산하 이곳 마산 새장터에서 장날에 맞춘 운동으로 거듭 폭발하였다. 이 날은 기하여 우리 고을의 의사들은 미리 갑절고개와 일광재 숲 속등에 회동 은밀히 태극기 7000여개를 제작 당일 장군들에게 배포하였다. 하오 한시가 되자 마침내 장거리 돈대위에서 독립선서가 낭독되고 이어 대한독립만세의 선창으로 2000 군중이 일제히 충천하는 만세를 외치며 온 장터를 누비기에 이르렀다. 목이 터지는 절규의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6명의 의사가 일경에 인치(引致) 저들의 경찰관 출장소에 감금되었다. 이에 의분한 우리 군중은 저들을 습격 감금된 동지들을 구출하였으나 이때 2명의 의사가 악귀들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에 더욱 격앙한 2000여 군중의 만세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즉각 기수를 서천으로 돌려 행진하였다. 그러나 그 만세행렬은 한산을 2리 앞둔 죽촌 모새다리에서 행진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 냇둑에 무장매복한 일대의 왜군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적의 무차별한 발포로 일진일퇴하던 우리의 만세행렬은 결국 역불급의 일시후퇴가 블가피하게 되었다. 이로하여 우리의 무행한 의사들은 투옥, 실형을 받고 수 많은 양민이 태형을 당하였다. 이에 우리 후대들은 선대의 그 거룩한 얼을 기리며 이를 만대후까지 이어 받들기 위하여 여기 유서깊은 마산 새장터에 이 비를 세운다. 1987년 3월 1일 서천군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 동아일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