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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도다. 단원들은 은밀한 모임끝에 3월 19일 합천시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미리 언언서와 태극기 수백매를 만들고 각 동리 집집마다 대양면 마장에 모이도록 통지하니 3월 19일 준비된 태극기를 갖고 합천읍에 잠입하다 오후 4시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 들었을때 시장복판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소리 높에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5백여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다. 의분에 넘친 군중의 함성은 시장거리를 누비면서 노한 사자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이에 놀란 일경 무장대가 총검으로 威嚇(위하)하고 심재기등 17명을 구금하고 강제해산케 하였으나 17명의 앞장섰던 동지를 경찰에 두고 차마 돌아가지를 못하다 일부가 회합 20일에 구출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인근 면리에 연락하여 20일 오후 7시에 합천읍에 결집하기로 약속하고 각자 임무 수행에 들다. 경술년 국치후 총독정치에 시달림을 당하는 분함을 3월 19일 합천시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핲장서니 출동한 일경들에게 동지들이 검거당하고 강제해산되어 돌아오니 분통함은 더욱 고조되도다. 그 다음낳 17명의 구출운동에 나서 제일 먼저 결사대에 자원하니 심맹권등 12명이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죽음을 같이 할것을 맹세하고 수백군중을 휘동하여 합천시장으로가 합세하니 오백며명이 되도다. 작동에서 참집한 군중과 합세하여 구금된 애국지사 석방요구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읍내를 시위하고 경찰서를 포위하니 당황한 서장이 선해산 후석방을 제의해 왔으나 우리측은 선석방 후해산을 요구하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않으니 극도로 격분한 군중은 결사대원을 선두로 태극기를 높이들고 노도와 같이 돌진하자 일경의 일제발포에 추용만 김영기 김호수 강시만이 순절하고 이공등 11명이 부상을 당하다 이공은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2년을 언도받고 서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그후 구국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