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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절대반대' 라는 기치 아래 시위를 전개하 다 36명이 검속되었고 72명이 무기정학과 근신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7일에 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에서 도 독자적으로 항일 시위가 있었다. 이와 같이 광주 학생의 항일 운동은 목 포·나주를 비롯하여 곧 서울로 점화되었으 며,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에는 신 간회(新幹會)의 영향이 컸는데, 중앙 본부 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金炳魯)와 허헌(許憲), 서기장 황상규(黃尙奎) 등이 광주학생항쟁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 하여 광주에 다녀와서 진상을 보고하자, 한용운(韓龍雲)·조병옥(趙炳玉) 등이 중심 이 되어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2월 9일 서울 학생들의 궐기로 12월 13일 예정했던 신간회의 민중운동은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이때 조병 옥·권동진(權東鎭)·한용운 등 신간회 회원 44명과 근우(槿友)·청총(靑總)·노총(勞總) 등의 관계자 47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중 앙청년동맹·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도 광주의 진상 조사를 하였다. 이와 같이 신간회와 청년단체·학생단체 에서 광주 사태에 대하여 '진상 조사'라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학생들의 대일 항쟁 의 분위기가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 을 입증하는 것이다. 드디어,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새 벽 사이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주요 공립·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 학생운 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 기를 촉구하는 격렬한 격문이 살포되었다. 경찰은 종로경찰서에 수사 총본부를 설 치하고 4일 정오까지 각 사상단체·청년단 체·근우회의 간부와 학생 등 127명을 검 거하고 조사에 나섰다. 5일 아침에도 40 여명을 더 검거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에서는 '학우회의자치','조선 역사의 교수 ' , '광주 학생에 대한 응원', '식민지 교육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진정서를 제출 하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으며, 7일에는 경 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교내 시위를 했다. 그 뒤 같은 취지로 경신·중동·보성·중앙· 휘문·협성실업·숙명·근화·배재학교 등이, 11일에는 이화·여자상업·동덕·실천여학교 (實踐女學校)·경성농업학교·법정학교·고등 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학교 한국인 학생 등이 광주 학생 지원을 위해 분기하 자, 배화·진명·중앙보육·정신·간이상공 등 의 각 학교는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개학하자 항일 운동은 다시 시동되었다. 1월 15일 보성전문학교 를 비롯한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서울 학생들은 광주학생 지원과 일제의 살인 정책을 규탄하고 성토·시위· 동맹휴교 등을 단행하였다. 서울 학생의 항일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참가한 학교 194개, 학생 수 5 만 4,000여 명이었으며, 퇴학 처분자 582 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으 로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 민족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