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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광주사범학교에서도 항일 학생으로 주 목받은 37명을 일시 귀향시켰다가 1930년 3월 19일자로 1명을 추가한 38명을 이른 바 항일 풍조의 예방을 위한다는 명목으 로 퇴학시키고 말았다. 1,000여 명이 되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 주농업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사 범학교 등 광주 시내 중학교 학생 대부분 이 항쟁에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이 가운 데 170여 명을 광주형무소에 투옥시켜 공 판에 회부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검 속 학생 총수는 12월 17일까지 247명이 며, 그 중 55명은 구속, 192명은 석방되 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부형들이 당국과 협의, '학생의 면학과 학부형의 보호 감독 철저' 등을 요지로 하는 굴욕적인 서약서 를 제출한 뒤에 겨우 12월 10일 개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1930년 1월 9일 2학기의 시험이 시작 되자 4학년 이하 학생들 모두가 백지 동 맹으로 항거하자 학교측은 이에 맞서 선 동자로 지목된 17명을 또 퇴학 처분하였 다. 14일에 일어 난 백지동맹에 가담한 244명의 학생을 3일간 자택에서 근신하도 록 하고, 15일에는 10일의 백지동맹 주동 자 48명을 퇴학 처분하였다. 이처럼 탄압과 저항이 교차되고 있는 가운데, 19일에는 2학년 학생 중 퇴학·정 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2학년생 전체의 자 퇴 운동을 전개하려다 학교 당국에 포착 되어 4명이 또 퇴학 처분되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1930년 1 월 10·11일 양일간 실시된 시험에서 백지 동맹이 기도되었는데, 15일에 백지 답안 제출자 37명에게 3일간 근신 명령을 내렸 으며 주모자 2명은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광주농업학교에서는 12월 17일까지 검 거된 학생 80명을 석방했다가 다시 2명을 검속, 1월 19일에는 독서회와 관련되어 있다라는 명목으로 다시 16명을 검거하였 다. 광주사범학교는 이미 38명이 퇴학 처 분되고 24명이 검찰에 넘겨졌다. 광주 학생의 항일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항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광주 학생들의 대일민족항쟁은 어 떤 특정 지역 학생이나 주민의 문제가 아 니라 전국 학생과 전 민족의 당면 과제였 다. 따라서, 학생이 항쟁 주체였으나 민족 각 계층의 성원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광주 학생의 항일 의지는 목포·나주·함 평 등으로 번졌고 드디어 서울 학생의 궐 기를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어 전국의 학생은 최악의 조건들을 뚫고 지성의 결의와 행동력을 발휘함으로 써 항일 학생운동 사상 불멸의 기록을 남 기게 되었다. 먼저 목포상업학교에서는 11월 3일 광 주 학생 항쟁의 소식을 전해들은 최창호 (崔昌鎬)·강영수(姜榮秀) 등 몇 사람이 주 동이 되어 광주 학생과 연락 끝에 11월 19일 '피감금학생즉시탈환', '총독폭압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