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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문이 요소 요소에 뿌려졌으며, 광주고등보 통학교 학생들은 우체국에서 대인동으로 진출하여 함성을 지르며 여자고등보통학 교의 참여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미 광주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교실 내 감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가두 행동대는 맹 렬한 시위로 진격하여 광주여자고등보통 학교를 거쳐 형무소 앞에서 함성을 지르 고 시위를 하였으며,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는 사범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하였으 나, 이들도 학교 당국에 의해 감금 상태에 있었다. 그때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달려 와 가세함으로써 시위 항쟁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 져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가두 행동대 주류는 일제히 구속되어 도청 앞에 있는 무덕전(武德殿)에 수감되었다. 한편, 광주농업학교는 격문을 담당한 조길룡(曺吉龍)이 12일 아침에 등교하여 격문을 뿌리자 3학년의 김남철(金南哲)· 김현수(金玄洙) 등의 주창으로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학교장의 저지로 실패한 5학년을 제외 한 전학년의 한국인 학생 140여명이 궐기 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격문을 뿌리면서 광주사범학교로 밀려가 광주고 등보통학교와 합류하였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12일 첫 시간 수업이 끝날 무렵 교문 밖에서 격문을 뿌 리며 공동 투쟁을 촉구하는 광주고등보통 학교 학생들에게 호응하여 일제히 교문을 뛰쳐나가려 했으나 경찰과 교직원의 적극 적인 저지로 교정에서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행동 저지를 돌파하지 못하자 다음날부터 동맹 휴교 상태에 들어갔고, 광주사범학교 측은 교사들의 극력 제지로 시위 운동이 좌절되었다. 이와 같은 광주 학생 대일 항쟁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제2차 투쟁 때부터 열기를 더해 갔다. 12일 당일 광주사범학교 앞에 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190여명과 광 주농업학교 학생 60여명이 검속되었다. 이날 검속된 학생과 11월 3일 직후 검 속된 학생들은 성진회·독서회 그리고 광주 학생관계 등으로 분류되어 공판에 회부 되었다. ​ 12일 항쟁 이후의 탄압 상을 보면 광주 고등보통학교는 300여명을 무기정학 처분 하고 임시 휴업에 들어갔으며, 광주농업학 교에서도 항쟁에 참가한 학생 전원을 무 기정학 처분하고 임시 휴학의 조처를 취 하였다 그리고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도 장경례 (張慶禮)·박봉순(朴奉旬) 등 17명을 취조 후 무기정학에 처했다. 이에 학생들이 동 맹 휴교로 탄압에 항거하니 학교 당국에 서는 임시 휴교를 선언하고 주모 여학생 64명을 무기 정학시켰다.